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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김응숙

신 김응숙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든다. 꽤 넓은 현관에 온갖 신발들이 뒤섞여 널려있는 사진이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신천지’를 풍자한 모양이다. 신이 이토록 많으니 ‘신천지‘임에 틀림없다. ’천지‘란 경상도 사투리로 매우 많다는 뜻이다. 얼마 전 코로나 19의 백신이 흰 고무신이라는 유머도 접했는데,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의 기지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종교도 없고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는 나이지만, 덕분에 종교에 관계없이 잠시 웃는다. 기왕 이런 사진도 보았겠다, 나는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달랑 두 식구가 살고 있는 우리 집 현관도 만만치 않다. 며칠 전 가까운 산을 다녀온 등산화 옆에는 농장에서 신었던 검은 고무신이 바닥에 진흙이 말라붙은 채로 벗겨져 있다. 날이..

좋은 수필 2020.09.27

토란잎을 듣다 / 조현미

토란잎을 듣다 조현미 토란잎에 비가 듣습니다. 낮고 음울한 비의 곡조가 누군가의 흐느낌 같습니다. 흘러 어딘가로 스며야 할 눈물이 괴는 곳은 결국, 가슴 아니겠는지요. 토란잎, 저 시푸른 멍은 채 거르지 못한 마음속 독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숨죽여 울던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무성한 토란잎 아래, 늦마*처럼 당신은 울고 있었지요. 크고 널따란 귀를 열어 제 설움에 귀 기울이는 토란처럼요. 흠뻑 젖고 나면 후련하련만, 울어도 젖지 않는 무엇이 있던 걸까요. 등이 따갑도록 당신은 그저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날, 하늘은 참 맑았습니다. 조붓한 비탈길과 만삭의 들판, 도르르 귀를 말고 물의 화음을 타는 물봉숭아와 희푸른 부추꽃…. 내가 열여섯 해를 살다 온 고향의 정경이 모두, 거기 있었습니다. 다..

좋은 수필 2020.09.09

[제15회 생활문예대상 은상 월간 『좋은생각』마른 꽃 / 박현

마른 꽃 박현 화초에 물을 주다가 스타티세 앞에 멈춘다. 물이 필요 없는 마른 꽃이다. 생화일 때나 말랐을 때나 변함없어 꽃말처럼 영원히 사랑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꽃은 친구가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아픈 사람이 무슨 정신으로 꽃을 골라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스박스에 나란히 놓인 여러 종류의 꽃은 화병 하나로는 부족할 만큼 많았다. 친구의 빈소에 다녀온 날 신발장 앞에 있던 스타티세가 눈에 들어왔다. 줄기는 물기 하나 없이 말랐지만 작은 꽃송이는 형형하게 빛났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 걷지도 못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교회 유아실에 누워서 입만 벙긋거리며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 겹쳐졌다. 몸은 뼈만 남았어도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화병에 꽂은 꽃들은 시들었지만 스타티세는 생화 같아..

문예당선 수필 2020.08.11

호박수제비 / 장미숙

호박수제비 장미숙 마을회관을 지나자, 어디선가 푸른 종소리가 들려온다. 주위는 온통 참깨 밭, 마을 길옆으로 넓은 참깨 밭이 펼쳐져 있다. 긴 종처럼 생긴 꽃 주위를 벌들이 웅성웅성 맴돈다. 벌이 꽃을 건드릴 때마다 ‘차랑차랑’ 종소리가 난다. 식물의 언어를 터득해야 들을 수 있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참깨 밭을 지나 고샅으로 접어든다. 한낮의 정적을 깨는 송아지 울음소리가 정답다. 바야흐로 나무의 잎이 가장 짙은 계절, 여름은 시골 골목에도 꽉 들어차 있다. 고향 집 감나무 이파리에 햇빛이 폭포처럼 부서져 내린다. 평상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감나무는 고향 집을 상징하는 풍경이다. 평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엄마의 등이 앞뒤로 흔들린다. 콩에 섞인 쭉정이를 고르고 있었는지 소쿠리 두 개가 놓..

좋은 수필 2020.08.08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 노정옥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노정옥 국도를 택한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열여덟 량 장대열차처럼 도로는 정체만발이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까울 때가 있을까. 차라리 잠시 쉴 곳을 찾는데 우측으로 트인 길 하나가 눈에 띈다. 순화된 어휘라고 느낌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길어깨란 갓길로 사용되기 전의 낱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더 좋아한다. 어깨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배어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당해 보이려면 어깨를 펴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깨를 내어주는 건 내 힘을 빌려주는 일이고, 어깨에 기대는 것은 상대에게서 안식을 얻는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니 길어깨란 무척 편안하고 정감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도 이런 어깨를 만나면 세상은 따뜻한 고향이..

문예당선 수필 2020.07.31

추임새 / 김순경

추임새 김순경 추임새 같은 맞장구가 큰 힘이 된다. 훈계나 훈시보다는 조용히 들어주고 가끔 고개만 끄덕거려도 좋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은 격려나 치유보다 상처 줄 때가 많다. 힘들 때 단점을 찾아내고 가르치기보다는 서로 추어주는 칭찬이 절실하다. 대학생 때 처음 판소리공연을 보았다. 소리꾼은 무대에 나오자마자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추임새를 아느냐고 물었다. 남도소리를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관객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니리와 창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를 때라 알 턱이 없었다. 설사 안다 해도 직접 공연을 본 적이 없어 섣불리 알은체할 수도 없었다. 머뭇거리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판소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추임새 넣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창을 할 때 흥을 돋우는 소리다. 청중의 분위기나 감흥..

좋은 수필 2020.07.27

돌절구 / 손광성

돌절구 손광성 얼마 전에 장안평에서 오래된 돌절구를 하나 사왔다. 몇 달 전부터 눈여겨 두었던 것이라 싣고 오는 동안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서도 뒷문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예쁜 색시 가마 태워 오는 신랑의 마음이 이러지 싶었다. ​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흠흠!' 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음에 살며시 와서 안기는 것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잘빠진 안성유기 술잔처럼 오붓하고 반만 핀 튤립같이 우아하다. 얼핏 보면 범상한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다. ​ 앞쪽 운두는 살짝 낮추고 뒤쪽은 그만큼 높였다. 앞을 낮춘 것은 앞턱에 절구공이 부딪치는 것을 막을 요량인 것 같고, 뒤를 높인 것은 확 속에 든 곡식이나 가루가 밀려서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듯싶다. 그 때문에 ..

좋은 수필 2020.07.22

마당 / 김만년

마당 김만년 고택마당이 윷놀이 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낙들이 장작만한 윷을 던지며 덩실덩실 마당춤을 춘다. 좌판이 명절 도드리음식들로 푸짐하다. 인절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툇마루에 앉으니 어느새 고향마당에 온 것처럼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생각해보면 마당을 잊고 산지 오래된 것 같다. 어릴 적 마당의 풍경은 계절마다 달랐다. 겨울마당은 빈 마당이다. 농한기로 접어들면서 어른들은 새끼를 꼬거나 화투를 치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마당도 무료한 듯 잔설을 담거나 살창바람을 흘러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볕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닥나무껍질을 삶아서 말렸다. 여우햇살 꼬리 내리는 마당 볕에 앉아서 매운 시집살이 시름을 벗기듯이, 한 올 한 올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삼동 볕에 걸어두곤 하셨다. 마당이 분주..

좋은 수필 2020.07.14

별 / 문 정

별 문 정 별빛을 따라 고흐가 걸어온다. 귀를 다쳤는지 붕대를 감고 있다. “귀는 왜 다치셨어요?” “내가 잘랐어.” “잘랐다고요? 왜요?” “엄마가 그리워서…….” “엄마가 안 계세요?” “응,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 얼굴을 감싼 붕대가 그의 슬픔만큼 커보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겁다. “저도 엄마가 안 계셔요. 제가 두 살 때 멀리 멀리 가버렸대요.” “저런 저런. 슬프겠구나. 그럼 아저씨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네, 가르쳐주세요.” “별을 크게 그려봐. 아주 크게. 그럼 엄마가 나타날 거야.” “정말요?” “응, 누군가 그리울 땐 별을 아주 크게 그리면 돼.” 고흐 아저씨는 어디로 가버리고 곤하게 아침잠에 빠져 있는 장면으로 바뀐다. 누군가가 볼에..

좋은 수필 2020.07.07

그림자 / 김응숙

그림자 김응숙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낙서를 하는 내 작은 그림자를 큰 그림자가 다가와 덮는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짧은 머리에 점퍼를 입은 그 아저씨라는 것을 알고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드리운 큰 그림자는 마치 검은 바위 같다. 나는 바위에 갇힌 채 꼼작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다. “꼬마야, 뭐하니? 그림 그리니?”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다. 큰 그림자기 움직이더니 아저씨가 내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내 작은 그림자가 아저씨의 신발 아래로 깔린다. 눈을 마주 보지 않았는데도 그의 눈빛이 나를 꿰뚫을 것만 같다. 나뭇가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제 아저씨는 아버지의 행방을 물을 것이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애야, 아버지는 ..

좋은 수필 202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