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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 김순경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김순경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가 죽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을 만난다. 빗물이 천천히 몸피를 적시자 늙은 산벚나무가 까맣게 변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세상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어도 때맞춰 꽃을 터뜨리려는지 마지막 기운을 모은다. 봄을 알려주는 노거수 사이에 그루터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초라한 몰골이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살점이 뜯겨나간 조장鳥葬처럼 곳곳에 응어리진 뼈마디가 드러난다. 상주도 백관도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껍질이 벗겨지고 없는 거무스름한 속살이 조금씩 삭아 내렸다. 억센 뿌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우듬지도 기억 속에만 남..

문예당선 수필 2021.01.05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 김미경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김미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

문예당선 수필 2021.01.05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 우마루내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우마루내 시어머니가 화장대 앞에서 당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칠십 년의 세월이 말해주듯이 하염없이 거친 얼굴이다. 한여름의 밭에서 기미가 올라왔고, 스킨과 로션 없는 생활을 해오면서 요철이 심해졌다. 형광등에 반사될 때마다 초배지(初褙紙) 같은 피부가 아른거린다. ​ 초배지는 초배할 때 사용되는 종이다. 초배가 정식으로 도배하는 정배 전의 애벌도배라면 초배지는 애벌벽지다. 초배지의 특성상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작업하기 때문에 벽지보다 허름한 신문지나 부직포가 사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허름한 종이여도 초배하지 않은 벽은 매끄럽지 않고 벽지가 쉽게 떨어진다. 외유내강이라는 한자성어처럼 외부가 말끔하기 위해서 초배지가 내부에서 단단하게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

문예당선 수필 2021.01.03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 이다온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이다온 진열대 위로 둥실 달이 떠오른다. 은은한 불빛이 바닥에 고인다. 조명을 받은 항아리는 방금 목욕하고 나온 아낙네 같다. 천의무봉의 살결이 백옥처럼 희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데도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자세히 보면 달항아리는 좌우균형이 맞지 않는 비대칭이다. 보름달이 약간의 기울기를 가진 것처럼. ​ 가슴이 사라졌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왼쪽 가슴을 확인했다. 불룩하게 솟아있던 자리가 분화구처럼 푹 꺼져 있다. 움푹 팬 곳에 낯선 어둠이 만져졌다. 두꺼운 밴드가 선홍색 칼자국을 애써 가렸다. 와락, 울음이 밀려왔다. 재빨리 환자복을 내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덮었다. ​ 이태 전이었다. 부산스럽게 외출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왼쪽 가슴에서 ..

문예당선 수필 2021.01.01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목포 바다에 갈치가 터졌다는 소식이다. 태풍이 한차례 바닷물을 뒤집어놓아 물고기들의 이동에 낚시꾼들은 이미 들떠 있다. 밤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야 없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끈들을 잠시나마 벗어 던지고,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에 자신을 풀어놓고 하룻밤쯤 있으면 삶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기회는 쉽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낚시 동행 광고를 내었지만 태공들은 한결같이 옆에 있으면 조황에 방해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방법은 따로 있었다. 초보도 가능한 낚싯배가 있다는 것이다. 뱃삯만 지불하면 미끼는 물론 낚싯대도 빌려준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낚싯배 신청을 하고도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생겼고 또 태풍에 미루어졌다가 겨우 나의 시간에 맞추어 출조일을 잡았다. 난생처음 ..

좋은 수필 2020.12.24

몸짓 / 김응숙

몸짓 김응숙 그해 1월, 우리 집 단칸방에 달력 하나가 걸렸다.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벽에 발라진 얇은 벽지에는 희미한 회색 꽃무늬가 엇갈리며 그려져 있었다. 그 벽지에 빈대자국 같은 붉은 녹물을 남기며 박힌 못에 기다란 열두 장의 달력이 걸린 것이다. 보통은 국회의원의 얼굴이 동그랗게 실린 벽보 같은 커다란 한 장짜리 달력이었지만, 어쩌다 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절을 하거나 그네를 타거나 하는 달력이 걸리기도 했다. 운이 좋은 해는 아랫동네 쌀가게에서 주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는 일일달력이 걸리기도 했는데, 그런 해는 노상 그 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가져오던 어머니가 설을 맞아 어쩌다 그 외상값을 다 갚았던 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해 우리 집 ..

좋은 수필 2020.12.12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 조현숙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조현숙 무람없는 발걸음이 햇발 가득한 절 마당의 고요를 깨뜨린다. 넌출진 능소화가 고목의 우듬지를 타고 오르며 날 굽어보는데도 기어이 불이문을 넘고 만다. 몇 시간 째 경내 구석구석, 도린 곁까지 맴돌았지만 ‘구리항아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걸까? 스님들의 수행 공간까지 헤집고 다니자 한 여인이 종무소 문을 열고 내다본다. 말 없는 꾸지람이리라. 그래도 염치없는 객은 모른 척, 항아리의 행방부터 묻고 본다. “동호라니, 그게 뭡니까?” 여인의 되물음에 그만 힘이 쑥 빠져버린다. 대웅보전을 청소하던 스님도, 작압전 앞을 지나던 스님도 동호의 행방을 물었을 때 꼭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보물 208호 구리항아리’라고, 벌써 몇 바퀴째 경내를 돌고..

문예당선 수필 2020.12.01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혜연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이혜연 물새 한 무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몇 번의 날갯짓으로 산만했던 대열을 가지런히 가다듬은 새들은 저무는 강 위를 두어 번 선회하더니, 선홍빛 노을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 간다. 휘모리 가락처럼 사위를 온통 붉은 빛으로 휘몰아 넣던 노을이 스러지고 나자, 한지에 먹물 스미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시각이다. 한낮의 거센 빛살에 숨을 죽이고 있던 사물들이 수런수런 제 기색을 찾는다. 산빛, 물빛이 깊어지고 불빛이 생기를 찾기 시작하는 시각. 낮이라기엔 어둡고 밤이라기엔 아직은 밝은, 빛과 어둠이 함께 하는 이 짧은 순간을 음미하며 나는 하루의 고단함을 벗고 평온함에 잠긴다. 모자란 게 많은 탓일까, 돌아보면 나는 늘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살아..

좋은 수필 2020.11.14

위로 / 이혜연

위로 이혜연 거의 온종일을 음악과 함께한다. 정통클래식을 주로 듣지만,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을 찾아 듣기도 한다. 늘그막 혼자 몸이다 보니 음악이 말 상대를 대신한다.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아들 내외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고, 구차해 보이기도 싫어 외롭다는 말 가슴에 꾹꾹 눌러 두고 산다. 어느 정도는 외로움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창 넓은 카페에 앉아 폼 내며 마셔대던 블랙커피처럼, 달콤하게 즐기던 고독이 요즘 들어 쓴맛을 일깨운다. 가슴이, 눌러 둔 말들로 묵직하다. 그래도 우울증이라든가 공황장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음악 덕분이라고, 음악이 그 지경까지 이르는 걸 막아준 것이라 믿었다. 어느 날 코로나19로 가중된 외로움을 지워보려고 보기 시작했던 모 TV 방송 트로트 경연 ..

좋은 수필 2020.11.04

[제20회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

[제20회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석류, 다시 붉다 김영인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문예당선 수필 2020.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