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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가작 당선작] 웃는 남자 / 정의양

[2022 제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가작 당선작] 웃는 남자 정의양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람의 뒷모습을 어쩌면 저리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편안한 모습이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김홍도의 염불서승도를 바라본다. 운해 속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 한 선승의 참선하는 뒷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삭발한 머리는 달빛에 파르라니 빛나고, 가녀린 목선을 따라 등판으로 흘러내린 장삼이 구름과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하늘은 난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스님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내 얼굴을 생각한다. ​ “얼굴 좀 펴라”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남들처럼 눈 코 입 하나 빠진 거 없는 외모이기는 하나 표정이 없어 그게 문제다. 아마도 삼신할미가 생명을 점지하고, 마지막 미소 한 ..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막사발의 철학 복진세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종이접기 / 이춘희

[2022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종이접기 이춘희 색종이 위에 온 마음을 담는다. 모서리를 맞추어 엄지로 지그시 누른다. 멀리 떨어진 꼭짓점을 맞대고 힘주어 문지른다. 접을수록 좁아지는 종이를 따라 마음도 쪼그라든다. ​ 종이접기는 유년의 나를 다양한 상상의 나라로 데려갔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 손오공을 만나고, 돛단배를 타고 무인도에 발을 디뎠다. 종이 인형에 빨간 저고리와 초록 바지를 입히며 엄마가 된 듯 흐뭇했다. 완성품을 만날 때마다 동심은 꿈속을 걸었다. 그 뒤로 성취감과 자신감이 따라왔다. ​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색종이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종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며 마음의 종이를 무던히도 접었다. 교과서적인 ..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돌챙이 / 오미향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돌챙이 오미향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자, 암벽 위에 작은 돌집이 보였다. 벼랑 위 깔깔한 소금기를 벗 삼아 삶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는 삭정이 같은 무릎을 보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만 불어도 거친 말 한마디만 내 던져도, 금세 기울 것 같은 수평을 아버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숭숭 구멍 뚫린 관절에 햇볕을 끌어모으고 먼바다를 내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잊었다는 것인지 다 지나간 일이라 모른다는 것인지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물 쓴물 다 빠진 아버지의 빈 가슴에 찾아 든 것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마음도 마른 웅덩이처럼 젖어들었다. 말랑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울컥했다. ​ 아버지가 평생 쌓아 놓은 돌들은 말이 없다..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 전성옥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전성옥 운동화 다섯 켤레를 미얀마로 보냈다. 포장 박스에 넣기 전, 운동화마다 발을 담아 보았다. 왼발, 오른발… 꾹꾹 눌러 담았다. 씨앗을 심듯이. 밥풀꽃이 한창 피던 즈음, 미스 미얀마의 눈물이 나에게 떨어졌다.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한 ‘한 레이’, 그녀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미얀마 국민의 아픔을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눈물은 침이 달린 뜨거운 쇠구슬이었다. 쿡쿡, 사정없이 내 가슴에 박혔다. 얼마 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한 ‘투자 윈 린’이 ‘Pray for Myanmar’란 피켓을 머리 위로 들었다. 2013년도 미스 미얀마 ‘타 테테’는 총을 들고 무장단체에 합류한다 했다. 젊고 어여쁜 그녀들이 ‘국가대표 미녀’의..

좋은 수필 2021.10.18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종이 위의 집 김응숙 사무실의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공인중개소 앞 사 차선 도로 너머에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단독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끼고 어깨를 맞대던 오래된 동네였는데 재건축이 된 모양이다. 하긴 전철역이 가깝고 나름 학군이 좋은 곳이니 개발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아파트는 한낮의 햇살 아래서 거대한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거리는 아파트가 깨끗이 닦아놓은 사무실 통유리에 그대로 얼비친다. 통유리에는 일정한 크기의 흰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종이마다에는 ‘00 아파트 00평, 00억’ 등의 매매정보가 쓰여 있다. 평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정 가격 아래의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통유리가 또 하나의 아파트 단지이기라도 한 것처..

좋은 수필 2021.09.02

[2021년 흑구문학상]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2021년 흑구문학상] 구멍 늧을 읽다 김원순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문예당선 수필 2021.07.23

마당가의 집 / 김응숙

마당가의 집 김응숙 ‘부산시 동래구 망미동 00번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주소이다. 수영강이 광안리 바닷가로 흘러들기 전 오른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면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들어앉은 동네였다.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팔도시장과 5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큰길을 건너면 광안리의 푸른 바다로 이어졌다.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갈대가 우거진 수영강둑이 길게 누워있었고, 그 너머로 수영비행장이 보였다. 강둑에는 저녁마다 핏빛보다 더 짙은 노을이 지곤 했다. 그 동네는 부산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겨우 전기가 들어와 있었을 뿐 신작로에서는 언제나 먼지가 풀풀 날렸다. 동네 앞 넘실거리는 보리밭 건너 저 멀리 큰 공장의 지붕이 보이고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이 보였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

좋은 수필 2021.07.18

첫사랑 / 김응숙

첫사랑 김응숙 모든 일에는 중개자가 있기 마련이다.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혜경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네 친구였다. 그녀의 집은 동네 맨 위에 있었는데, 일층짜리 양옥이었지만 대문 입구에 커다란 파초나무가 서 있는 제법 부잣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공부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가끔씩 그 집을 드나들었다. 파초그늘을 지나며 마주보이는 창문의 노란색 커튼은 언제나 조금 열려 있었다. 그 방은 그녀 오빠의 방이었다. 사업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은 모양이었다. 거실 전면을 차지한 장식장에는 각양각색의 양주병이 즐비했다. 그 아래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형에서부터 허리에 풀치마를 두른 토인인형까지 줄을 지어 서있었는데, 세상의 인종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맨 위 칸에는 검은색..

좋은 수필 2021.03.24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 유성은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유성은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

문예당선 수필 202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