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토란잎을 듣다 / 조현미

희라킴 2020. 9. 9. 17:41

                                                                                              토란잎을 듣다

 

                                                                                                                                                     조현미

 

 

 토란잎에 비가 듣습니다. 낮고 음울한 비의 곡조가 누군가의 흐느낌 같습니다. 흘러 어딘가로 스며야 할 눈물이 괴는 곳은 결국, 가슴 아니겠는지요. 토란잎, 저 시푸른 멍은 채 거르지 못한 마음속 독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숨죽여 울던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무성한 토란잎 아래, 늦마*처럼 당신은 울고 있었지요. 크고 널따란 귀를 열어 제 설움에 귀 기울이는 토란처럼요. 흠뻑 젖고 나면 후련하련만, 울어도 젖지 않는 무엇이 있던 걸까요. 등이 따갑도록 당신은 그저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날, 하늘은 참 맑았습니다. 조붓한 비탈길과 만삭의 들판, 도르르 귀를 말고 물의 화음을 타는 물봉숭아와 희푸른 부추꽃…. 내가 열여섯 해를 살다 온 고향의 정경이 모두, 거기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너는데 햇살이 강에 물비늘을 그리고 있었지요. 볕인 듯 그늘인 듯 어지러운 윤슬이 꼭 내 마음 같았습니다. 맨 처음 개구리헤엄을 배울 때 저수지 물빛이 그러했던가요. 대문이 열려 있었는지, 닫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이 꽤 크고 높았다는 것, 엉성하나마 격식을 갖춘 솟을대문이었다는 것밖에는. 매캐하면서도 달보드레한 연기가 반기는 듯, 떠미는 듯 마당을 맴돌던 것 외에는.

 

 당신은 무척 바빠 보였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중에도, 이후로도 내내 집 안팎을 총총거렸으니까요. 마당에서 마루로, 부엌으로, 또 방으로…. 눈빛 마주할 틈마저 아끼려는 듯, 아깝다는 듯 말입니다. ‘틈’이란 가까이 있을 때 가장 또렷한 법입니다. ‘아끼는’ 것과 ‘아까운’ 것. 이 둘의 간격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당신과 마주 앉았지요. 그러나 좋이 세숫대야만 한 화로도, 쇠붙이를 지져대는 잉걸불도 끝내 우리 사이의 침묵을 가르진 못했습니다. 딴엔 긴장을 풀기 위해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습니다만…. “응.” 또는 “그래.”, 화답은 그뿐. 그때 절감했지요. 이미 우리 사이엔 메우기엔 너무 완강한 틈, 거대한 크레바스가 존재한다는 것을요. 작고 야윈 몸과 주름 깊은 얼굴에서 설핏 친정어머니를 느낀 건, 저만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종잇장만 한 부침개가 수북해질 무렵, 시누이들이 도착했지요. 당신의 무표정한 얼굴에 반짝, 해가 비치더군요. 집 안팎이 잔칫집처럼 흥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에 식구가 한 명 느는 일이니 경사라면 경사겠지요. 그런데 잔치의 주역이어야 할 마음이 왜 그리 쓸쓸하던지요. 어디든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종이컵에 담아 집을 나섰지요. 고추밭을 지나 다리를 건너, 등 굽은 산길을 한 마리 실뱀처럼 느리게, 느리게 올랐습니다. 저무는 가을 모퉁이, 차고 흰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오래전 상여 뒤를 따르던 흰옷의 무리처럼요. 메밀꽃 한 송이에 어머니, 어머니……. 한 사람을 목이 젖도록 불렀던가요. 그 이름이 너무 낯설어서 자꾸만 눈이 젖었습니다. 어쩌면 간절한 마음을 하늘도 읽었던 걸까요? 갑자기 비가 듣기 시작했습니다.

 

 토란잎 그늘은 생각보다 으늑했습니다. 한 사람이 웅크리면 족할, 몰래 숨어 울기에 그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빗줄기가 토란잎을 두드리면 바람이 낭창낭창 토란대를 흔들어 빗물을 흘려보내고 있었지요. 찬비처럼 우는 등허리를 가만히 쓸어주시던 유년의 내 어머니처럼요. 너무 오래 눈물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비워야 채워지는 것을요. 조금씩 제 몸을 살라 먹고 자란 달이 보름에 이르듯 말입니다.

 

  빗물에 함빡 맘을 적시고 나니 몸이 한결 가붓해졌습니다. ‘우리 집 식구가 되려면 한 방에서 다 함께 자야 한다’는 시누이들의 짓궂은 농담도 웃음으로 받아넘겼지요. 그렇게 ‘시’자 붙은 사람들과의 어색한 하룻밤이 지나갔습니다.

 

 그새 양쪽 손가락을 두 번 접었다 펼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날로 웃자라는 토란처럼 아이는 커 가고, 흙이 좋아 흙만 파던 아버님도 끝내 흙으로 돌아가셨지요. 당신의 머리칼에도 메밀꽃이 수북합니다.

 

 돌아보면 그날처럼 섧던 기억이 어디 한두 번일까요. 함께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나브로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것일 뿐.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일컫는 말이라지요. 부모와 자식이, 스승과 제자가, 부부가 그러하듯 모든 인연엔 적당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산다는 건 결국, 조금씩 틈을 메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관계가 너무 벌지는 않게 관심을 기울이면서요. 오래 들어 주면서요….

 

 다시 가을. 우리는 또 화로 앞에 마주 앉았습니다. 잉걸불 위에선 메밀전이 익어가고, 부추는 기다란 장대를 들어 하늘의 별꽃을 다 딸 기셉니다. 안방에선 교통상황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향길을 재촉하고요. 오래전 그날의 풍경과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버님의 빈자리에 딸애가 앉아있다거나, 당신이, 더러 ‘간’이나 ‘맛’을 핑계로 부침개를 넌지시 밀어주시는 것 외엔.

 

 톡톡, 비 꽃이 피는 산길을 오릅니다.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혀로 굴리며 쌉싸래한 지난날을 반추합니다. 이제는 당신의 동선을 쫓으며 맘 졸일 일도, 침묵의 속내를 가늠하며 지레 속상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평화로워 단조롭기까지 한 풍경에 와락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나조차 낯선 ‘나’를 거울 앞에서 마주할 때마다요. 당신의 어떤 모습에서 미래의 ‘내’가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요.

 

 토란처럼 그늘이 많은 생이었지요, 팔십여, 당신의 삶은. 더러 숨어 우는 뒷모습을 맞닥뜨리곤 했다는 걸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버님의 술 푸념을 고스란히 받아낸 뒤거나, 자식들의 날 벼린 말이 가슴에 대못을 치던 날이었을 겁니다. 깊은 밤, 쪼그리고 앉은 당신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아드려야 하는데, 위로라도 건네야 하는데 그땐 내 설움이 너무 커서 당신께 귀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산 지 반세기가 넘었건만 당신 또한 혼자서 몰래 울 곳이 절실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그 눈물이 굳어 가슴에 견고한 둑을 쌓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도 오래 품으면 진주가 된다지요. 눈물의 결정 진주가 물나라의 산물인 줄만 알았습니다. 모진 빗줄기를 등으로, 등으로 받아내며 토란도 흙 속에서 보석을 키우는 것을요. 제 눈물을 받아 마시며 사리처럼 단단해지는 것을요.

 

 채 못 전한 고백처럼 늦털매미가 웁니다. 이 비 그치면 가을볕도 바싹 여물겠지요. 토란잎에 고인 빗물을 가만가만 흘려보냅니다.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습니다.

 

 

 

* 늦마: 제철이 지난 뒤에 지는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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