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1079

풍화風化 / 최운숙

풍화風化 최운숙 주문하지 않은 관 두 개가 왔다. 어찌 된 거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경찰관 앞에 앉았다. 왜 그랬는지, 왜 그곳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부검을 결정해야 했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칼은 쓰지 않기로 했다. 관속에 반듯하게 누운 얼굴이 평화롭다. 지금껏 보아온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이다. 삶의 경계를 벗어난 순간 고통은 비켜섰을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건다. 관은 각刻 하나 새기지 않은 밋밋한 그의 얼굴을 닮았다. 휘두를 칼도 없었거니와 마음에 담아둔 그릇도 없었으니 세상의 흔적이 섞이지 않는 그와 딱 어울리는 옷이다. 그는 얇은 나무 옷을 입고 시간여행 길에 누웠다. 세상에 와서 오래 살지도, 악착같이 버티어 보지도, 치열하게 사랑해보지도 않았으니 땅속에 누울 수도 없다. 더욱이 옷을..

좋은 수필 2023.08.06

껍데기 / 박동조

껍데기 박동조 투명한 형체에 등은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허물 속은 텅 비었다. 비어버린 속과는 아랑곳없이 여섯 개의 발은 안간힘을 다해 나무를 붙안고 있다.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껍질을 뚫고 날아간 몸체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어둡고 습한 땅속에서 굼벵이로 산 세월에 그리움이라도 남은 것인가? 허물은 굼벵이가 매미로 우화할 때 남긴 껍데기다. 껍데기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풍화의 시간으로 내던져졌다. 미래는 껍데기의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곧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닥칠 것이다. 과연, 나무를 훔켜쥔 여섯 개의 발은 몰아치는 눈바람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오로지 무로 사위어 가는 게 껍데기에 주어진 소명이다. 흔히들 노년을 ..

좋은 수필 2023.08.06

돌부처 / 김응숙

돌부처 김응숙 단풍객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숲속 길가 한 편에 돌부처 한 분 앉아 계신다. 언어도단이라 했던가. 저들의 말로는 도저히 뜻을 전할 길이 없어 이렇듯 비켜앉았나 보다. 석굴암을 향해 가는 길 어디쯤이다. 사람들은 천 년이 넘어도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석굴암 본존불을 뵈러 가기에 여념이 없다. 언뜻 보아도 몇몇 시비와 함께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부처 또한 대중에게 관심이 없는지 마냥 똑같은 표정이다. 반쯤 내리뜬 눈과 엷은 미소는 전적으로 해석의 영역이다. 천년고도 신라의 상징인 처용의 미소를 걷어내고 보면 그 영역은 더 넓어진다. 명상에 잠긴 눈 같기도 하고, 졸음에 겨운 눈 같기도 하다. 자비로운 미소로 보이다가 무언가를 꾹 참고 있..

좋은 수필 2023.06.28

우엉을 먹으며 / 정성화

우엉을 먹으며 정성화 남편이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다. 배에서 가족 생각이 날 때 나를 어떤 모습으로 떠올리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던 모습’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우면서 민망했다. 그만큼 내가 삼겹살을 자주 구워 먹었다는 얘기다. 입맛도 연어처럼 제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걸까. 근래 들어 어릴 때 먹었던 음식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저녁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초저녁에 평상에 둘러앉아 먹었던 양푼이 비빔밥, 겨울이면 자주 상에 올라오던 갱시기죽. 아버지가 낚시로 잡아온 민물고기로 바특하게 조려낸 생선조림 등. 그때는 분명 먹기 싫었던 음식들인데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어쩌면 음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 속에 남아..

좋은 수필 2022.06.26

암탉론 (나의 수필론) / 김응숙

암탉론 (나의 수필론) 김응숙 나는 암탉이다. 첫 문장을 써놓고 골똘히 바라본다. 짧고, 의미도 간결해 첫 문장으로 제격이지 싶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사람인 내가 암탉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와 암탉 사이가 너무 멀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갓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의 눈이 녹기가 무섭게 양계장을 청소하고, 날개에 갓 깃털이 돋은 삼십여 마리의 병아리들을 채워 넣었다. 그때부터 물과 모이를 주는 것은 나의 소임이었다. 병아리들은 쑥쑥 자랐다. 솜털이 빠져 민들레 갓털처럼 양계장을 휘휘 돌아다녔다. 꽁지깃이 나고 봉숭아꽃색 벼슬이 맨드라미꽃처럼 붉어지면 중닭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산란용 사료 부대를 헐고 푸성귀를 썰어 부지런히 모이를 주었다. ..

좋은 수필 2022.06.26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 이혜연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이혜연 “다 늦게 뭐 하는 거야?” 장 본 것들 정리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곧 아버지가 들어올 시각이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퉁바리를 놨다. “이제 아버진 남자도 아니라며?” “….” 나는 다시 한번 퉁바리를 주었다. “정 없다며? 정 버린 지 오래라며?”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 없이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의 입술은 와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색깔이었다. “정 뗐다는 말 말짱 거짓말이네 뭘.” 어머니는 심통이 나 퉁퉁 불어 있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고관절 수술로 불편해진 몸을 어렵사리 일으키며 한마디 툭 던졌다. “정은 무슨…, 여자의 자존심이다.”..

좋은 수필 2022.01.12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 전성옥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전성옥 운동화 다섯 켤레를 미얀마로 보냈다. 포장 박스에 넣기 전, 운동화마다 발을 담아 보았다. 왼발, 오른발… 꾹꾹 눌러 담았다. 씨앗을 심듯이. 밥풀꽃이 한창 피던 즈음, 미스 미얀마의 눈물이 나에게 떨어졌다.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한 ‘한 레이’, 그녀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미얀마 국민의 아픔을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눈물은 침이 달린 뜨거운 쇠구슬이었다. 쿡쿡, 사정없이 내 가슴에 박혔다. 얼마 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한 ‘투자 윈 린’이 ‘Pray for Myanmar’란 피켓을 머리 위로 들었다. 2013년도 미스 미얀마 ‘타 테테’는 총을 들고 무장단체에 합류한다 했다. 젊고 어여쁜 그녀들이 ‘국가대표 미녀’의..

좋은 수필 2021.10.18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종이 위의 집 김응숙 사무실의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공인중개소 앞 사 차선 도로 너머에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단독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끼고 어깨를 맞대던 오래된 동네였는데 재건축이 된 모양이다. 하긴 전철역이 가깝고 나름 학군이 좋은 곳이니 개발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아파트는 한낮의 햇살 아래서 거대한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거리는 아파트가 깨끗이 닦아놓은 사무실 통유리에 그대로 얼비친다. 통유리에는 일정한 크기의 흰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종이마다에는 ‘00 아파트 00평, 00억’ 등의 매매정보가 쓰여 있다. 평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정 가격 아래의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통유리가 또 하나의 아파트 단지이기라도 한 것처..

좋은 수필 2021.09.02

마당가의 집 / 김응숙

마당가의 집 김응숙 ‘부산시 동래구 망미동 00번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주소이다. 수영강이 광안리 바닷가로 흘러들기 전 오른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면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들어앉은 동네였다.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팔도시장과 5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큰길을 건너면 광안리의 푸른 바다로 이어졌다.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갈대가 우거진 수영강둑이 길게 누워있었고, 그 너머로 수영비행장이 보였다. 강둑에는 저녁마다 핏빛보다 더 짙은 노을이 지곤 했다. 그 동네는 부산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겨우 전기가 들어와 있었을 뿐 신작로에서는 언제나 먼지가 풀풀 날렸다. 동네 앞 넘실거리는 보리밭 건너 저 멀리 큰 공장의 지붕이 보이고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이 보였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

좋은 수필 2021.07.18

첫사랑 / 김응숙

첫사랑 김응숙 모든 일에는 중개자가 있기 마련이다.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혜경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네 친구였다. 그녀의 집은 동네 맨 위에 있었는데, 일층짜리 양옥이었지만 대문 입구에 커다란 파초나무가 서 있는 제법 부잣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공부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가끔씩 그 집을 드나들었다. 파초그늘을 지나며 마주보이는 창문의 노란색 커튼은 언제나 조금 열려 있었다. 그 방은 그녀 오빠의 방이었다. 사업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은 모양이었다. 거실 전면을 차지한 장식장에는 각양각색의 양주병이 즐비했다. 그 아래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형에서부터 허리에 풀치마를 두른 토인인형까지 줄을 지어 서있었는데, 세상의 인종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맨 위 칸에는 검은색..

좋은 수필 202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