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15회 생활문예대상 은상 월간 『좋은생각』마른 꽃 / 박현

희라킴 2020. 8. 11. 19:29

                                                                                            마른 꽃

 

                                                                                                                                                              박현

 

 화초에 물을 주다가 스타티세 앞에 멈춘다. 물이 필요 없는 마른 꽃이다. 생화일 때나 말랐을 때나 변함없어 꽃말처럼 영원히 사랑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꽃은 친구가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아픈 사람이 무슨 정신으로 꽃을 골라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스박스에 나란히 놓인 여러 종류의 꽃은 화병 하나로는 부족할 만큼 많았다.

 

 친구의 빈소에 다녀온 날 신발장 앞에 있던 스타티세가 눈에 들어왔다. 줄기는 물기 하나 없이 말랐지만 작은 꽃송이는 형형하게 빛났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 걷지도 못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교회 유아실에 누워서 입만 벙긋거리며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 겹쳐졌다. 몸은 뼈만 남았어도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화병에 꽂은 꽃들은 시들었지만 스타티세는 생화 같아 화분에 옮겨 심었다. 화초에 물을 줄 때나 거실에 무심히 앉았다가 고개를 돌리면 친구를 보듯 눈을 맞추게 됐다.

 

 친구 남편이 우리 부부에게 밥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는 퇴직하고 몇 년간 아내를 병간호하다가 얼마 전 대형병원에 미화원으로 취직했다. 전에 일한 곳에서 다시 출근하라고 했지만 몸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래야 밤에 잠이 잘 온다고 했다. 만나기 며칠 전 그는 카카오톡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내가 사놓고 거의 못 입어 본 옷과 신발이 있는데 내가 쓴다면 아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선뜻 가져다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친정이나 시댁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유품을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가족이 아닌 사람의 것은 말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어렵사리 입을 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좋다고 했다. 점심 먹기로 약속한 날 그는 우리 집에 왔다. 차에 싣고 온 상자의 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옷이 다섯 상자, 신발이 두 상자였다. 쇼핑백에는 미처 사용하지 못한 여러 색깔의 털실뭉치와 누구에게 주려던 것인지 대바늘 코가 걸린 절반쯤 뜨다 만 목도리도 있었다. 그는 옷을 넣다 보니 아내가 “여보 이것도 가져가. 이 옷을 안 넣었네.” 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 버릴 것만 빼고 모두 가져왔다고 했다.

 

 옷 박스를 여러 번 날라서 현관에 들이고 식당으로 향했다. 단호박 오리찜을 좋아하는 친구와 몇 번 들른 곳이다. 친구 하나 없는데 자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친구가 워낙 웃음이 많고 목소리가 컸던 터이기도 할 것이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잠들 듯 편하게 임종을 맞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거절했다고. 다시 살아날 것 같은데 재우면 영영 못 깨어날까 봐 그랬단다. 결국 고통스럽게 가게 해서 마음 아프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안경에 눈물 한 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친구가 이 봄을 맞고 싶어 했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친 그의 눈물이 더 가슴을 조여 왔다. 아내가 없더라도 개의치 말고 자주 만나자고 남편이 말했다.

 

 상자를 하나씩 열어가며 옷을 입어 보았다. 뜯지 않은 속옷과 새 양말도 있었다. 친구가 투병하는 동안 마음이 쓰일 때마다 돈을 보냈다. 나중에 부조하는 것보다 살아있을 때 먹고 싶은 것 사 먹는 게 낫지 싶었다. 스스로 놀랄 만큼 돈이 아깝지 않고, 비자금 만들려고 시작한 적금을 해지하고서도 오히려 기뻤다. 이 옷들은 친구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옷과 비슷한 코트도 있었다. 유품이라 입기 주저했던 마음, 입는 척 하면서 버리려 했던 생각이 친구의 환청을 들었다는 소리에 바뀌었다.

 

 오늘도 옷을 입으며 시들지 않는 마른 꽃처럼 여전히 내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참 좋았던 내 친구. 잊지 않을게. 잘 지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