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신 / 김응숙

희라킴 2020. 9. 27. 18:25

                                                                                          신 

 

                                                                                                                                                     김응숙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든다. 꽤 넓은 현관에 온갖 신발들이 뒤섞여 널려있는 사진이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신천지’를 풍자한 모양이다. 신이 이토록 많으니 ‘신천지‘임에 틀림없다. ’천지‘란 경상도 사투리로 매우 많다는 뜻이다. 얼마 전 코로나 19의 백신이 흰 고무신이라는 유머도 접했는데,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의 기지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종교도 없고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는 나이지만, 덕분에 종교에 관계없이 잠시 웃는다.

 

 기왕 이런 사진도 보았겠다, 나는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달랑 두 식구가 살고 있는 우리 집 현관도 만만치 않다. 며칠 전 가까운 산을 다녀온 등산화 옆에는 농장에서 신었던 검은 고무신이 바닥에 진흙이 말라붙은 채로 벗겨져 있다. 날이 더워져 신으려고 꺼냈던 샌들은 발 앞쪽이 너무 조이는 바람에 신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해 구석으로 밀쳐놓았고, 꼬질꼬질 때가 묻은 운동화는 결국 뒤축을 꺾어 신는 막신 신세로 전락해 널브러져 있다.

 

 나는 신발장의 문을 열고 당장 신지 않는 신들을 챙겨 넣는다. 신장 안에 있던 더 많은 신들이 나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신지 않았던 장화도 보이고 겨울 부츠도 보인다. 이제는 신지 못하는 하이힐도 보이고 한복 밑에 신는 꽃신 한 켤레도 보인다. 그리고 낱낱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신들이 신장 깊숙한 곳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은 신들을 신고 살아왔다. 신들은 저마다 개성이 강해서 자신에게 맞는 상황과 조건을 요구했다. 나는 그 상황과 조건에 맞도록 신을 선택해서 신었다. 비가 오면 장화를 신었고, 눈이 오면 부츠를 신었다. 데이트를 갈 때는 하이힐을 신었고, 산을 오를 때면 등산화를 신었다. 그 각각의 신들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신들은 내 발에 꼭 붙어서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나와 함께 살았다. 나는 값이 싸고 발이 편한 신발을 사기도 했고, 발이 불편해도 값이 비싼 신발을 사기도 했다. 묘하게도 나는 신을 바꿔 신을 때마다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데, 이를테면 하이힐을 신은 나와 등산화를 신은 나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신은 신에게 최대한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신이지만 때때로 그 신에게 지배를 받았던 셈이다.

 

 이렇게 나처럼 신에게 지배를 받았던 이들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중 내가 제일 처음 접한 이는 신데렐라였다. 신데렐라의 신은 유리 구두였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 유리 구두의 지배를 받은 이는 신데렐라뿐이 아니다. 그녀의 계모와 이복자매들, 심지어 신데렐라를 사랑한 왕자도 유리 구두의 지배를 받았다. 유리 구두 한 짝씩을 들고 서로를 찾는 신데렐라와 왕자에게 유리 구두라는 신은 사랑이었을 테고, 계모와 이복자매들에게 유리 구두라는 신은 부귀영화였을 것이다. 이들은 유리 구두를 신고, 벗고, 잃고, 쫓고, 찾으며 살아갔다. 인간의 발이라는 가장 낮은 곳에 신겨지는 신이 그들을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끝없는 희망을 품으면서 말이다. 나는 한참 나이가 든 후에 두 짝의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과연 다시는 신을 바꿔 신지 않았을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신을 신기 위해 애를 쓴 신데렐라와는 달리 신을 벗기 위해 몸부림 친 이도 있다. 분홍신의 카렌이다. 이 소녀는 아름다운 분홍신에 이끌려 신을 신고 춤을 춘다. 그런데 카렌은 춤을 멈출 수도 없고 신을 벗을 수도 없다. 언제까지나 분홍신을 신고 춤추며 떠돌아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카렌에게 분홍신을 신는 순간 영원히 벗을 수 없다는 주문을 걸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이가 되면 분홍신이 인간의 욕망을 비유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게 된다. 그래도 신을 신고 있는 것이 괴로우면 그저 멈춰서 신을 벗으면 그만이지 발목까지 잘랐다는 그 결말은 지금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신은 신는 것이지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금시대’에서 찰리채플린이 자신이 신던 구두를 삶아놓고 격식을 차리며 먹는 장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급하면 신도 삶아먹는 것이 인간이다. 신보다도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은 때로는 팥알을 씻어 절간에 다니고, 때로는 개척교회 돌계단을 오르는 어머니를 두고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것은 생활이어서/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이 삶이 펴지지 않으면/ 저 신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하리라.’하고 읊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절간에 가는 어머니의 발에 신겨있는 흰 고무신과 교회의 돌계단을 오르는 굽 낮은 구두를 떠올렸다.

 

 신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나이 구십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병원을 찾은 내 손을 은밀하게 잡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셨다. 어느 날 논둑을 가다가 쓰러지셨는데 자신이 죽어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이 몸속에서 빠져나와 쓰러진 자신을 바라본다는, 어느 영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의 기분이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발을 조이던 신을 벗어버린 느낌이라고 하셨다.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편안하고 자유롭더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맑아서 나는 덜컥 아버지의 말을 믿고 말았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던 아버지는 두 달 후 편안한 얼굴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하기야 육신을 벗으면 신을 신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황야를 헤매던 예수님이 장화를 신고 있었다거나, 들판에서 구도하던 부처님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분들이 신이어서 신을 신지 않았는지, 신을 찾기 위해 신을 벗어버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분들이 맨발로 신에게 다가간 것은 신을 벗지 않으면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없다는 가르침 같기도 하다.

 

 잡다한 신들을 정리하고 나니 현관이 한결 환하다. 지난여름에 즐겨 신고 다녔던 살구색의 심플한 구두를 내어 놓는다. 슬쩍 한 발을 넣어본다. 내일 이 신이 나를 모처럼 모이는 글쓰기 모임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너무 조이지 않도록 발뒤꿈치 끈을 조금 풀어 본다.

* 송경동 시인의 시 「당신의 운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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