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마당 / 김만년

희라킴 2020. 7. 14. 19:13

                                                                                      마당 

 

                                                                                                                                             김만년

 

 고택마당이 윷놀이 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낙들이 장작만한 윷을 던지며 덩실덩실 마당춤을 춘다. 좌판이 명절 도드리음식들로 푸짐하다. 인절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툇마루에 앉으니 어느새 고향마당에 온 것처럼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생각해보면 마당을 잊고 산지 오래된 것 같다. 어릴 적 마당의 풍경은 계절마다 달랐다.

 

 겨울마당은 빈 마당이다. 농한기로 접어들면서 어른들은 새끼를 꼬거나 화투를 치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마당도 무료한 듯 잔설을 담거나 살창바람을 흘러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볕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닥나무껍질을 삶아서 말렸다. 여우햇살 꼬리 내리는 마당 볕에 앉아서 매운 시집살이 시름을 벗기듯이, 한 올 한 올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삼동 볕에 걸어두곤 하셨다. 마당이 분주해지는 때는 정월대보름이다. 이때쯤이면 투전놀이 가셨던 아버지도 헛기침을 하시며 사립문을 들어선다. 어머니는 눈 꼬리를 허투로 흘리며 휑한 걸음으로 닭 모이를 주신다. 윷놀이는 샘이 가까운 우리 집 마당에서 펼쳐졌다. 여자들은 마당 한 쪽에 삼발이를 걸고 장정들은 돼지를 잡는다. 몇 순배의 농주에 얼큰해진 말(馬)들이 윷판을 달린다. 모처럼 마당이 윷놀이 판으로 흥겹다. 밤이 들면 아이들은 깡통을 들고 논둑으로 내달린다. 붕붕! 망우리 불꽃들이 폭죽처럼 밤하늘로 솟구친다. 마당이 지저깨비를 물어 나르는 아이들 발소리로 밤새 분주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당이 그때서야 달빛을 머금고 환하게 펴진다.

 

 봄 마당은 꽃 마당이다. 사람들이 일터로 가고 나면 마당은 꽃들의 차지다. 사립문밖엔 홍도화 살구꽃 자두꽃, 사립문 안엔 앵두꽃 감꽃, 담벼락엔 채송화 맨드라미 벼슬 꽃......, 마당이 온통 꽃잎으로 분분하다. 묵은 닭들이 온종일 마당에 쓸려 다니는 꽃잎들을 물고 뒤뚱거린다. 보리누름 넘실대는 유월이 되어서야 우리 집 마당에도 사람들이 들어선다. 이맘때쯤 단오마당이 열린다. 여자들은 합심해서 샘을 치고 창포에 머리를 감는다. 첫새벽 첫물을 떠다가 조상님께 정화수를 올린다. 장정들은 울력으로 굵은 타래새끼를 꼬아 느티나무에 건다. 여자들이 그네를 타는 동안 남자들은 마당에서 씨름판을 벌인다. 쌍그네를 타던 고모가 미나리꽝에 냅다 꽂힌다.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화전을 부치는 마당이 온통 꽃마당 꽃웃음으로 자글하다.

 

여름마당은 별 마당이다. 멍석 위에 누워서 옥수수를 먹으며 북극성을 헤아린다. 새로 산 모기장 위로 멍석별이 쏟아진다. "밤이슬 맞을라 얼릉 들어오너라."는 어머니의 성화도 귓전으로 흘린다. 개구리소리 산짐승소리 타닥타닥 콩대 타는 소리도 귓전으로 흘린다. 머리맡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별무리를 좇아 누이랑 밤이 이슥하도록 별자리여행을 떠난다. 은모래를 깔아 놓은 은하 강에는 밤새 흰 염소들이 풀을 뜯는다. 강 저편에는 삼형제별들이 반짝인다. 하나 둘 별을 세다가 오줌이 마려워 깨어보면 어느새 방안이다. 밤새 어머니가 한 놈씩 업어다가 아랫목에 눕혔던 게다. 마당엔 가끔씩 꽃가마를 탄 새색시가 들어오기도 하고 북망길을 떠나는 할머니의 구성진 상여마당이 들어서기도 한다. 긴 장마가 시작되면 닭도 사람도 두문불출이다. 비는 마당을 쓸고 때론 마당을 쓸어가기도 한다.

 

 가을마당은 타작마당이다. 맨 먼저 끝물고추가 들어오고 뒤이어 참깨 수수 올콩들이 줄줄이 아버지의 지게에 얹혀 마당으로 들어온다. 마당이 오곡 상을 차린 듯 풍성하다. 이때쯤이면 쥐들도 신이난다. 볼이 터지도록 토실한 낱알들을 물고 담 구멍을 분주히 들락거린다. 햇살이 자글자글 쏟아지는 마당에서 아버지는 앞산이 쩌렁하도록 흥을 돋우며 도리깨질을 하신다. 뒷산 장끼가 꺽꺽 놀란 울음을 토해낸다. 어머니는 부지깽이 장단으로 깻단을 톡톡 터신다. “옥에 갇힌 춘향이는 이도령 오기만 고대고대~” 어머니의 춘향가 한 소절에 마당 앞 감나무는 속살을 더욱 붉힌다. 아이들은 잿불에 구운 ‘국시꼬랭이’를 들고 마당을 쏘다닌다. 집집마다 금붙이 같은 호박 몇 덩이씩은 굴러다니고 국수 삶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한다.

 

짜고 매운 인생살이가 함께 어우러지던 마당은 차츰 먼 기억의 공간속으로 유폐 되어 가는 듯하다. 오동나무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옛집도 깻단을 털던 타작마당도 이젠 사라졌다. 아이들은 떠나고 주인은 풍장에 든 지 오래다. 지금쯤 고향집 마당도 명아주 여뀌풀이나 키우며 풍상에 들어있을게다. 마당은 ‘땅, 장소’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논다. 불러들인다. 품는다.’라는 동적인 의미도 함께 내재되어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동무를 사귀고 세상으로 가는 첫발을 내 딛는다. 어른들은 마당을 통해서 이웃과 소통하고 협동했다. 마당굿을 열어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도 했다. 지게작대기 장단으로 흥을 돋우며 한 해의 고달픔을 잊고 삶을 재충전했다. 그처럼 마당은 단순한 장소의 의미를 넘어 이웃과 세상으로 가는 징검돌이자 우리네 고달픈 삶에 신명을 불어넣어 주던 인생무대이기도 했다.

 어느 땐가 마당을 떠나 온 후부터 내 삶도 각박해진 것 같다. 생업에 떠밀려 일상을 동동거리다 보니 마음도 조급해진 것 같다. 돌아가는 여유보다 질러가는 속도감에 이력이 났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 폰이 나의 마당이 된지 오래다. 도시의 각진 모서리에 앉아서 층층이 단절음만 송출하다보니 약간의 소음에도 머리가 곤두선다. 배려보다는 불협화음의 주파수가 먼저 일어선다. 다 마당의 부재 때문이리라. 마음의 마당이 좁아진 탓이리라. 어릴 적 배불뚝이 박이 얹힌 초가집과 둥근달 둥근 마당이 있어 마음마저 흐벅지고 둥글어지던, 그 안온했던 마당을 떠나 나는 지금 어느 모서리에서 상한 깃을 내리고 있는 걸까.

 

 자박자박, 까치발을 앞세워 유년의 마당을 돌아 나오는 길,  ‘마당’ 하고 가만히 읊조리면 등 굽은 당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둥글고 넉넉한 자리 군말 없이 내어주던 당신의 너른 품이 보인다. 차지고 영근 곡식들 광으로 들여보내고 빈 땅으로 돌아앉은 당신의 가없는 희생이 보인다. 비우면서 스스로 충만한 마당, 그 너른 품에 어머니란 동의어를 가만히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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