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632

봄동 / 정성화

봄동 정성화 유년 시절에 살았던 집은 재래시장 안에 있었다. 우리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세 들어 살던 아저씨는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우리 집 바로 앞에서 그릇을 팔았다. 평소 말이 없던 아저씨가 그릇을 팔 때면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한쪽 발을 굴러가며 박수를 치거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렸고 때로는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객쩍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장사를 하면 그렇게 신이 나는지 궁금했다.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을 두고 어른들은 '촌놈 생일'이라고 했다. 다들 자신의 생일을 맞은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반가움에 서로 손을 맞잡고 그동안의 밀린 안부를 묻는 사람들 뒤에서는 국밥집의 가마솥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다리가 묶인 채 날개를 퍼덕이던 장닭, 기름기가 반들반들하던 부침개, 요란하게 북을 치..

좋은 수필 2020.06.16

쇠똥구리 / 김애자

쇠똥구리 김애자 굴리고 또 굴린다. 작은 덩어리를 크게 불리려면 쉴 수가 없다. 손톱만 한 몸뚱이에 철갑옷을 두르고 머리통을 찍어 붙인 까만 눈은 온종일 남의 배설물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억센 팔다리로 쇠똥더미를 점령한 녀석은 쇠똥에 주둥이를 처박고 이리저리 헤집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피 한 방울 침 한 모금 섞어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조물조물 뭉쳐 종자 씨를 만든다. 빈 하루가 등짝에 업힌다. 샛별을 지고 나선 가장의 어깨에 하루 치 짐이 천형처럼 누른다. 쭈그러진 자루를 부풀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비틀어진 골목길을 잽싸게 달린다. 먹고 자고 새끼 쳐 키울 둥지라도 마련하려면 퍼질러진 똥 더미의 잔해를 헤집는 것쯤은 각오한 일이 아니던가. 쇠똥구리가 눈을 반짝인다. 녀석은 화등잔만큼 커진..

좋은 수필 2020.06.12

두부야 미안해 / 김만년

두부야 미안해 김만년 코로나19로 세상이 흉흉하다. 딱히 갈 만한 곳도 없고 해서 주말농장을 찾았다. 굼실굼실 부풀어 오르는 흙을 보면 절로 호미가 잡고 싶어진다. 아홉 평 채마밭에 나를 격리시키다 보면 꽃도 새도 꼼지락거리는 땅강아지 한 마리도 새롭게 보인다. 가쟁이 같은 햇살을 타고 고물고물 일어서는 생명들이 경이롭다. 이랑을 만들고 열무씨앗을 묻는데 아까부터 한 무리의 개들이 나를 보고 서있다. 개구쟁이들처럼 무리지어 밭두렁을 쏘다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 한다. 생긴 모양들이 모두가 다르다. 복실이도 있고 껑충이도 있고 푸들이도 있고 발바리도 있다. 모두가 집 잃은 고아들처럼 몰골들이 꾀죄죄하다. 아마 주인 잃은 유기견(遺棄犬)들이지 싶다. 줄지어 달리는 모양새를 보니 나름의 영역과 서열도 있..

좋은 수필 2020.06.12

완행열차 / 김순경

완행열차 김순경 시작부터 가파른 너덜겅 길이다. 지천에 널려있는 진달래꽃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올랐다. 제법 옹골찬 폭포를 지나니 무척산 정상이다.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직도 옅은 물안개가 인다. 기적 소리에 놀란 오리 떼가 강물을 박차고 나룻배도 물결을 타고 조금씩 몸을 뒤척인다. 강줄기를 따라 경부선 열차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푸른 나이에 경부선 완행열차를 탔다. 첫차라 그런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열차가 도심을 벗어나자 바로 낙동강을 만났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말없이 강물만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뜻대로 풀리지 않은 안타까움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고민했던 일들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대기업에 다니다 휴직계를 냈다...

좋은 수필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