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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風化 / 최운숙

풍화風化 최운숙 주문하지 않은 관 두 개가 왔다. 어찌 된 거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경찰관 앞에 앉았다. 왜 그랬는지, 왜 그곳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부검을 결정해야 했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칼은 쓰지 않기로 했다. 관속에 반듯하게 누운 얼굴이 평화롭다. 지금껏 보아온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이다. 삶의 경계를 벗어난 순간 고통은 비켜섰을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건다. 관은 각刻 하나 새기지 않은 밋밋한 그의 얼굴을 닮았다. 휘두를 칼도 없었거니와 마음에 담아둔 그릇도 없었으니 세상의 흔적이 섞이지 않는 그와 딱 어울리는 옷이다. 그는 얇은 나무 옷을 입고 시간여행 길에 누웠다. 세상에 와서 오래 살지도, 악착같이 버티어 보지도, 치열하게 사랑해보지도 않았으니 땅속에 누울 수도 없다. 더욱이 옷을..

좋은 수필 2023.08.06

껍데기 / 박동조

껍데기 박동조 투명한 형체에 등은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허물 속은 텅 비었다. 비어버린 속과는 아랑곳없이 여섯 개의 발은 안간힘을 다해 나무를 붙안고 있다.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껍질을 뚫고 날아간 몸체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어둡고 습한 땅속에서 굼벵이로 산 세월에 그리움이라도 남은 것인가? 허물은 굼벵이가 매미로 우화할 때 남긴 껍데기다. 껍데기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풍화의 시간으로 내던져졌다. 미래는 껍데기의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곧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닥칠 것이다. 과연, 나무를 훔켜쥔 여섯 개의 발은 몰아치는 눈바람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오로지 무로 사위어 가는 게 껍데기에 주어진 소명이다. 흔히들 노년을 ..

좋은 수필 2023.08.06

나무말뚝 / 마경덕

나무말뚝 마경덕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일어서다니, 한 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울분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했다 떠나가는 뒤통수나 보면서 또 외발로 늙어갈 것이다

좋은 시 2023.06.29

돌부처 / 김응숙

돌부처 김응숙 단풍객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숲속 길가 한 편에 돌부처 한 분 앉아 계신다. 언어도단이라 했던가. 저들의 말로는 도저히 뜻을 전할 길이 없어 이렇듯 비켜앉았나 보다. 석굴암을 향해 가는 길 어디쯤이다. 사람들은 천 년이 넘어도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석굴암 본존불을 뵈러 가기에 여념이 없다. 언뜻 보아도 몇몇 시비와 함께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부처 또한 대중에게 관심이 없는지 마냥 똑같은 표정이다. 반쯤 내리뜬 눈과 엷은 미소는 전적으로 해석의 영역이다. 천년고도 신라의 상징인 처용의 미소를 걷어내고 보면 그 영역은 더 넓어진다. 명상에 잠긴 눈 같기도 하고, 졸음에 겨운 눈 같기도 하다. 자비로운 미소로 보이다가 무언가를 꾹 참고 있..

좋은 수필 2023.06.28

몇 초의 포옹 / 조남숙 -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몇 초의 포옹 / 조남숙 -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폐허는 사람이 없어야 폐허가 된다. 역사의 한 부분을 떠들썩하게 채워 넣던 도읍지였을망정 인걸이 간데없어지면 폐허가 된다’(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서현 지음 / 효형출판, 2014)는 문장에서 폐허를 생각한다. 사람은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유기체다. 유기체는 공간에 모여 구분 불가능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사람의 힘은 달콤하면서 힘이 있다. 사람 구경 할 수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 극장이나 공연장,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다. 그중에서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계단이다. 나에게 세종문화회관은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

문예당선 수필 2023.01.04

우엉을 먹으며 / 정성화

우엉을 먹으며 정성화 남편이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다. 배에서 가족 생각이 날 때 나를 어떤 모습으로 떠올리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던 모습’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우면서 민망했다. 그만큼 내가 삼겹살을 자주 구워 먹었다는 얘기다. 입맛도 연어처럼 제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걸까. 근래 들어 어릴 때 먹었던 음식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저녁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초저녁에 평상에 둘러앉아 먹었던 양푼이 비빔밥, 겨울이면 자주 상에 올라오던 갱시기죽. 아버지가 낚시로 잡아온 민물고기로 바특하게 조려낸 생선조림 등. 그때는 분명 먹기 싫었던 음식들인데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어쩌면 음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 속에 남아..

좋은 수필 2022.06.26

암탉론 (나의 수필론) / 김응숙

암탉론 (나의 수필론) 김응숙 나는 암탉이다. 첫 문장을 써놓고 골똘히 바라본다. 짧고, 의미도 간결해 첫 문장으로 제격이지 싶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사람인 내가 암탉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와 암탉 사이가 너무 멀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갓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의 눈이 녹기가 무섭게 양계장을 청소하고, 날개에 갓 깃털이 돋은 삼십여 마리의 병아리들을 채워 넣었다. 그때부터 물과 모이를 주는 것은 나의 소임이었다. 병아리들은 쑥쑥 자랐다. 솜털이 빠져 민들레 갓털처럼 양계장을 휘휘 돌아다녔다. 꽁지깃이 나고 봉숭아꽃색 벼슬이 맨드라미꽃처럼 붉어지면 중닭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산란용 사료 부대를 헐고 푸성귀를 썰어 부지런히 모이를 주었다. ..

좋은 수필 2022.06.26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 이혜연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이혜연 “다 늦게 뭐 하는 거야?” 장 본 것들 정리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곧 아버지가 들어올 시각이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퉁바리를 놨다. “이제 아버진 남자도 아니라며?” “….” 나는 다시 한번 퉁바리를 주었다. “정 없다며? 정 버린 지 오래라며?”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 없이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의 입술은 와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색깔이었다. “정 뗐다는 말 말짱 거짓말이네 뭘.” 어머니는 심통이 나 퉁퉁 불어 있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고관절 수술로 불편해진 몸을 어렵사리 일으키며 한마디 툭 던졌다. “정은 무슨…, 여자의 자존심이다.”..

좋은 수필 2022.01.12

[2022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껍질의 길 / 김도은

[2022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껍질의 길 김도은 건조했던 나의 귀가 수족관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에 촉촉해진다. 병원 관리원이 복도에 있던 유리 속 세상을 대청소중이다. 호스를 타고 들어온 투명한 물줄기들이 수족관으로 콸콸 쏟아지고 물이끼로 불투명했던 유리 안쪽 세상이 말갛게 깨어난다. 붕어, 잉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앉았던 수초가 다시 일어선다. 느릿느릿 우렁이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입원 중인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작년에 결혼해 임신한 딸이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무생채를 해볼 참이다. 막상 무를 사 오기는 했는데 무생채를 만드는 일이 아득하다. 커다란 무를 썰려니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칼을 힘주어 누르니 중간에 단단히 꽂혀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아삭아..

문예당선 수필 2022.01.04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쪽항아리/ 김희숙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쪽항아리 김희숙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문예당선 수필 2022.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