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 노정옥

희라킴 2020. 7. 31. 19:04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노정옥

 

 국도를 택한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열여덟 량 장대열차처럼 도로는 정체만발이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까울 때가 있을까. 차라리 잠시 쉴 곳을 찾는데 우측으로 트인 길 하나가 눈에 띈다.

 

 순화된 어휘라고 느낌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길어깨란 갓길로 사용되기 전의 낱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더 좋아한다. 어깨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배어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당해 보이려면 어깨를 펴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깨를 내어주는 건 내 힘을 빌려주는 일이고, 어깨에 기대는 것은 상대에게서 안식을 얻는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니 길어깨란 무척 편안하고 정감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도 이런 어깨를 만나면 세상은 따뜻한 고향이 된다.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길어깨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당연히 어머니가 아닐까. 하지만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내 유년은 빗물에 젖어 있는 운동화처럼 늘 질퍽거렸다. 중학교 입시에 합격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축하한다는 한마디 말씀이 없었다. 새어머니 때문일까. 공부시킬 형편이 되지 않아서일까. 다음 해 입시에서도 결과는 똑같았고 아버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셨다. 하릴없이 하루해를 보내는 건 참으로 서러운 일이었다. 저물어 가는 강둑에 앉아 행여 나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들리는 건 어미 소를 따라가는 새끼의 울음소리, 간간이 철교를 달려가는 까만 기차의 긴 기적소리뿐이었다.

 

 등록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섣달 짧은 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산으로 뒷걸음질쳤다. 학예회 때 입을 캉캉치마를 마련 못해 공연을 못 했어도, 가고 싶은 수학여행을 못 갔어도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또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 북받치는 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우리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는 학교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당신이 명색이 교육자요? 제 새끼 교육을 나 몰라라 하고 있소? 교육자라면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깨어 있어야지. 평소와 다른 험악한 표정의 선생님이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 눈길은 하마터면 굴절할 뻔한 운명에 밝고 곧은 획 하나가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첫 번째 길어깨였다. 하루라도 공부에 손을 떼지 않도록 일주일 분량의 학습지로 채점까지 곁들이며 꼼꼼히 보살펴 주셨다. 그뿐이랴. 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는 내가 콩쥐처럼 안쓰럽게 보였을까. 주말이면 가끔 가족들의 밥상에 불러서 따뜻한 밥 한끼를 먹여주던 선생님. 훗날 상급학교 입학 때마다 치러내야 하는 곤욕과 좌절감 속에서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며 어깨에 힘을 넣곤 했다. “걱정 마, 너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

 

 길어깨를 거꾸로 읽으면 ‘깨어길’이 된다. 살아가면서 어깨에 기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다른 이에게 흘려보낼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하고, 어깨를 내어 주는 사람은 늘 주변을 돌아보는 품을 가지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나름 해석해 본다.

 

 상아탑 아래에서 마지막 졸업식이 있던 날, 마치 어렸을 때처럼 눈물이 괴어올랐다. 울려 퍼지던 엘가의 행진곡도 내겐 단순한 축가가 아니라, 먼 기억 속의 한 소녀를 토닥이며 응원하던 선생님의 낭랑한 음성이었다. 그분이 아니었던들 내 삶에 학(學)이라는 문(門)이 이처럼 활짝 열렸으랴.

 

 원만하게 자라지 못한 아픔이 속 깊이 박혀서일까. 생활이 차츰 안정되면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이 뜨였다. 결혼 이주민이었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겪는 혼란은 참으로 딱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가족과의 대화는커녕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도, 글 한 줄 읽어 줄 수 없는 난감한 처지였다. 뜻있는 동료와 함께 그들을 도우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이 일은 막연했지만 베풀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출발했다. 더러는 그들 가족을 집에 초청하여 내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잔치가 있는 날이면 오륙십 인의 밥을 지어 자동차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베풂이 아니라 나눔이었고 이주민들이 내게 준 것이 외려 더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넘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했고 보람 있는 삶의 품을 더 넓혀 주었으므로.

 

 일리노이에 있는 아들에게 갔을 때의 일이다. 아울렛에서 혼자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밖은 벌써 컴컴한 데다 빗방울까지 듣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 바삐 차를 몰다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서 버렸다. 휴대전화도 집에다 두고 왔다. 달려도 달려도 끝은 보이지 않고, 저 멀리 비치는 불빛 아래로는 밤의 색깔과 같은 사내들이 집 마당에 서성대는 모습만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국경마저 넘어서는 게 아닐까. 멈출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달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 속에서 심장은 요란하게 방망이질을 해댔다. 관공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얼마를 달렸을까. 희부연 깃발 하나가 내게 초혼을 하듯 고공에서 펄럭거렸다. 샛길로 빠진 길목에 불이 켜진 우체국이었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날만큼은 한밤에도 깨어있던 우체국이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준 길어깨였다.

 

 길어깨 중 가장 으뜸은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깨에 지친 몸을 기대고 맡기면 체온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인정이 솟는다. 삶의 반려자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 그 행복의 참맛을 조금씩 누리게 되었다. 내 인생에도 햇살이 손을 내민 것일까. 잠시 잠깐의 고마운 길어깨와 영원히 함께하는 가족이라는 탄탄한 어깨가 있는 한 강둑에 앉아서 날마다 엄마를 그리던 그 아이는 이젠 어디에도 없다.

 

 차 밖으로 내려섰다. 한 평 남짓한 떡갈나무 그늘이 반갑기만 하다. 경사진 길섶 따라 핀 비비추며 패랭이꽃, 쑥대공이……, 여름 들꽃이 서로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홀연히 날아든 나비 한 마리가 이 꽃대 저 꽃대 위를 나풀거리다 금계국 위에 살며시 날개를 접는다. 움찔, 꽃대가 흔들린다. 쉬어 가는 나비에게 꽃이 잠시 어깨를 내어주는가 보다.

 

 막혔던 길이 한순간에 뚫렸다. 피로가 풀리고 생기마저 돋는다. 한아한 들꽃 향기를 자동차에 가득 싣고 시동을 켠다. 잡은 운전대에 불끈 힘이 솟는다. 어서야 가자,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