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완행열차 / 김순경

희라킴 2020. 6. 11. 19:17

                                                                                              완행열차 

 

                                                                                                                                                          김순경

 

 시작부터 가파른 너덜겅 길이다. 지천에 널려있는 진달래꽃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올랐다. 제법 옹골찬 폭포를 지나니 무척산 정상이다.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직도 옅은 물안개가 인다. 기적 소리에 놀란 오리 떼가 강물을 박차고 나룻배도 물결을 타고 조금씩 몸을 뒤척인다. 강줄기를 따라 경부선 열차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푸른 나이에 경부선 완행열차를 탔다. 첫차라 그런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열차가 도심을 벗어나자 바로 낙동강을 만났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말없이 강물만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뜻대로 풀리지 않은 안타까움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고민했던 일들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대기업에 다니다 휴직계를 냈다. 병역 특례 대상이었는데 갑자기 나온 영장 때문이었다. 특례를 받으며 공부를 더 하려고 간 기간 산업체였는데 느닷없는 입영통지서 때문에 당황했다. 인사과와 병무청 담당자를 만나 따져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방안이 없었다. 친구들도 가는 군대라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역마다 멈춰 섰다. 한숨 돌릴 때쯤이면 어김없이 기적도 울려댔다. 무성영화처럼 돌아가는 기억을 추스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직원의 어이없는 실수였다 해도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큰형님이 먼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몸조심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낙동강 끝자락은 호수같이 잔잔하다. 태백산 기슭 황지연못에서 출발해 천삼백 리 길을 내려왔다. 수없이 합쳐지고 갈라지던 물길이 마지막 숨을 고른다.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가 되고 소를 만나면 정신없이 돌다가도 끊임없이 낮은 곳을 찾았다. 이제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떠밀리듯 천천히 내려간다.

 

 입대는 새로운 도전이다. 온실과도 같은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전혀 낯선 곳에서 삼 년을 보내야 한다. 장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집결지로 가는 길은 두려움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지난 며칠 동안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얼굴들이 부표처럼 떠올랐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뭔가 얻어 오리라 다짐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강물도 늘 푸르지만은 않다. 처녀 뱃사공이 노를 젓던 낙동강도 피로 물든 적이 있다. 강줄기를 가운데 두고 서로 총칼을 겨누며 골육상쟁을 벌일 때는 핏물이 되어 흘렀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에게 총질하고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는 주검을 지켜보았고, 화랑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져간 젊은이들의 비명과 절규도 들었다. 언제나 삼키고 참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성난 파도가 되어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이 달려든다. 그래도 생명의 젖줄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지자 점점 말이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마른기침만 삼킨다. 뜨거운 기운이 목젖을 타고 올라오자 기적 소리도 길어진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본다. 앞을 가리던 물안개가 자취를 감추자 잘게 부서지는 물비늘에 눈이 빛났다.

 

 덧없는 청춘도 지나고 보면 순간이다. 까까머리 장정도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초로가 되었다. 경부선 열차는 예나 지금이나 강줄기를 따라 바쁘게 오르내리지만 그날 마음을 달래주던 얼굴들은 이제 내 곁에 없다. 정적을 깨는 무척산 딱따구리 소리만 무심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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