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손에게 헌사(獻詞)를 / 민명자

희라킴 2020. 2. 29. 19:58

손에게 헌사(獻詞)를 민명자  나는 손입니다. 나의 주인이 태어날 때 이 세상에 함께 와서 평생 일심동체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왔지요.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나는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하고 조아리며 충성을 바쳤답니다. 나는 주인과 운명공동체이니 주인의 운명이요, 삶의 산 증인이니 주인의 자서전인 셈이지요.

 나에겐 다섯 자매가 있답니다. 그 아이들 이름은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예요. 그 아이들이 없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뿐인가요. 왼손까지 합치면 열 자매지요, 나의 왼쪽엔 든든한 반려자 왼 손이 있으니까요. 왼손 없는 나는 짝 잃은 기러기지요. 아무리 힘든 일도 둘이서 맞잡으면 척척, 못해낼 일이 없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나의 주인 이야기, 아니 왼손과 지나온 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나의 주인이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 들던 어린 시절, 나도 따라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거나 포대기에 싸여 꿈을 꾸곤 했지요. 주인이 차츰 뒤집고 기기 시작할 때 나는 방바닥을 놀이터삼아 발 노릇도 대신했어요. 기어 다닌다는 건 네 발로 걷는 거나 다르지 않지요. 나의 주인이 드디어 아장아장, 두 발로 걷게 되면서부터는 ‘죔죔, 짝짜꿍’을 하며 재롱 떨기 바빴지요. 나는 점점 할 일이 많아졌어요. 장난감 대신 연필 쥐고 차츰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아, 공부와 가까워지면서 동화 같던 시절은 조금씩 멀어졌지요. 연필은 펜이나 만년필로, 다시 컴퓨터로, 내가 쥐던 필기구 따라 주인의 세월도 시대도 달라진 것이지요. 나는 지금 주인이 펼치는 생각의 물결 따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답니다.

 나의 주인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난 후에는 나는 그 아이를 보듬는 손길이 되었지요. 우윳병을 쥐거나 밥 짓고 음식 만들고 빨래하고, 아휴, 동분서주,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로 하루가 휙휙 지나갔답니다. 나의 주인은 서예도 꽤 오래 했답니다. 결국 일필휘지의 꿈은 접고 말았지만, 편물, 양재, 민화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랍니다. 칼질, 붓질, 뜨개질, 바느질, 나는 주인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였어요. 뭐니 뭐니 해도 분필 들고 칠판에 글씨 써가며 학생들과 만날 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내 주변엔 친구들이 많아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친구들이 있지요. 주인의 직업 따라 친구들 하는 일도 천태만상이에요. 농부를 섬기는 친구는 뙤약볕에서 호미 쥐고 잡초와 싸우고, 어부를 섬기는 친구는 바다에서 그물이나 낚싯대 들고 어족과 씨름하지요. 요리사를 섬기는 친구는 하루 종일 물 묻히며 먹을거리 만들기에 여념 없지요. 요즘은 먹방 시대라서 바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답니다. 미용사가 주인인 친구는 하루 종일 머리카락과 연애하지요. 한 친구는 폐지 줍는 팔순 할아버지를 섬기고 있어요. 펜대 잡고 근사한 직장에서 잘나가던 때도 있었다던데 요즘엔 고생이 만만치 않지요. 또 한 친구는 할머니의 지팡이를 짚는 손이 되기도 하지요. 아, 그런데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우리를 제발 나쁜 일에는 쓰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헌신이 순교에 가까운 데도 ‘더러운 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는 슬프거든요.

돌고 도는 인생 따라 수생(手生)도 돌고 도는 것이지요. 내가 주인으로 섬기던 아이가 커서 짝을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커서 짝을 만나 아이를 낳고, 나의 주인이 할머니가 되고 말았어요. 이제 나는 그 손자손녀의 손을 잡는 손이 되었어요. 요즘에는 나이 들어 방안에서 책갈피 넘기는 일도 중요한 일 중의 하나랍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을 내가 잘나서 한 게 아니네요. 혹시 팔 없는 손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나요? 팔이 있어 나의 헌신이 가능했겠지요? 팔 님! 고마워요.

*

 내 손을 펴서 손등과 손바닥을 본다. 쭈글쭈글한 주름과 손금들에 그동안 내가 거쳐 온 삶의 굴곡진 길이 새겨져 있다. 고단한 생의 마디도 굵직하다.

‘손 없는 색시’ 이야기가 생각난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민담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분포한 ‘계모형 설화’의 일종인데 그림 형제는 이 이야기를 ‘손 없는 처녀’로 문자화했다. 여러 유형이 있고 다각도로 분석이 가능한 이야기지만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바로 ’손‘이다. 왜 하필 손이 없을까. 이 이야기에서 전실 딸은 계모의 악행으로 손이 절단된 채 내쫓긴다. 손이 없어 밥을 굶는다는 건 죽음과 다름없다. 먹을거리를 산이나 들에서 채취하거나 농사지어 구하던 옛 시대엔 더욱 그러했으리라. 즉 손의 유무는 생명적 삶의 여부를 좌우한다. 여러 고난을 거친 끝에 손이 기적적으로 재생됨으로써 ‘색시’의 삶도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가며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뿐인가. 최초로 석제도구를 만들어 썼다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후예들은 인류문명의 발달에 기여해왔다. 자유롭게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손의 공로 덕분이다. 거대한 빌딩도 작은 텃밭 하나도 손의 노고가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하긴 알라딘의 ‘지니’도 못한 일은 있었다. 사랑하는 일과 죽음에 관한 일이라던가. 손에도 그런 전능함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도처에서 숱한 손들이 이 세계를 움직인다. 그 힘은 성쇠를 거듭하면서 인간 삶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소중한 것은 당연한 듯 잊히기 일쑤다.

 무심히 대해왔던 손을 쓰다듬어 본다. 엄지손가락이 기어이 탈이 나서 병원엘 다니는 중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하나 되어 기쁠 때 박수쳐주고 슬플 때 눈물 닦아준 나의 두 손, 그대들에게 헌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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