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일상을 굽다 / 김응숙

희라킴 2020. 4. 5. 19:18


                                                                  일상을 굽다 


                                                                                                                                      김응숙


아파트 상가 담벼락을 끼고 포장마차 하나가 들어섰다. 붉은색 천막으로 지붕을 치고 투명한 비닐로 양 벽을 삼았다. 땅에 닿은 비닐 자락은 모서리가 깨진 큼지막한 시멘트 블록으로 질끈 눌러 놓았다. 그렇게 시멘트 뒷벽 하나 기대고 앉은, 말갛게 안이 들여다 보이는 그 포장마차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사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붕어빵을 구워 팔기 시작했다.

 산 너머 먼 곳에 눈이라도 오는지 회색 하늘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오후, 나는 붕어빵 포장마차를 찾았다. 춥니, 안 춥니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애초 집을 나설 때 차림새가 허술했는지 목도리를 둘렀어도 어깨가 옹송그렸다. 둥근 붕어빵들에서 퍼져 나오는 온기가 반가웠다.

 붕어빵 이천 원어치를 달라는 내 말에 여인의 손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반죽 주전자를 들었다 놓더니 빵틀을 돌리고, 고리를 걸어 빵틀 뚜껑을 열고는 기름 솔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영 초보 티가 났다. 플라스틱 진열장에는 꼬리가 까맣게 탄 붕어빵 몇 마리가 멀거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첫 장사인 듯했다. 여인의 손가락과 손등에 벌겋게 덴 상처들이 보였다. 붕어빵 굽기에 급급해 데인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내 손이 가려워졌다.

그녀의 앞에는 열 개의 입을 가진 둥근 붕어빵틀이 놓여있었다. 그 포장마차에서 가장 무거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아직 반들거리지는 않았지만 검은 몸집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품새를 보니 왠지 안심이 되었다. 바람이 불면 바스락거릴 것 같이 야윈 데다가 눌러 쓴 모자 밑으로 흰머리가 비어져 나온 여인은 손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마치 뒷벽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그런 여인을 그 무쇠 붕어빵틀이 단단하게 끌어당겨 땅에 발을 디디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빵틀에 열이 올랐는지 반죽을 붓자 치지직 소리가 났다. 아마도 천도가 훨씬 넘는 고온에서 제 몸을 녹이고 다시 만들어진 붕어빵틀일 것이다. 이 정도의 가스불 열기에는 코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조금 기다리자 빵틀이 하나 둘 붕어빵을 내놓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던 흰 반죽이 제법 정교한 양각의 붕어 모양으로 굳어져 있었다. 빵틀은 그 두터운 몸피에 스민 열기로 은근하게 반죽을 품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열기를 섣불리 내치지도, 급하게 토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품에 깃든 것이 형태를 바꿔 새롭게 탄생할 때까지 말이다. 품는다는 것에는 지독한 인내가 숨어있다. 제 몸의 형태가 바뀌는 특이점을 통과한 무쇠만이 가지는 내공이다.

 붕어빵틀을 보고 있자니 오래 전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가마솥이 생각났다. 살다보면 자꾸만 일상이 허물어져 내리는 때가 있다.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 같은 내일, 그래서 일상은 지루하기까지 하다. 별 일이 없을 때에는 단단한 벽돌로 쌓아올린 담처럼 견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벽돌 중 어느 하나에 금이 가고 부서지기 시작하면 담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더 이상 일상이 일상일 수 없었던 어느 날부터 나는 국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손등에 덴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곁에는 무쇠로 된 가마솥이 있었다.

 팔을 힘껏 뻗어야 손이 닿는 품이 넓은 가마솥이었다. 반쯤 찬물을 넣고 불을 붙이면 가마솥 안쪽으로 마치 땀방울 같은 기포가 맺혔다. 너의 수고를 기꺼이 같이 감당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같았다. 물이 끓으면 한 솥 가득 사골을 넣었다. 그때부터 가마솥은 무섭도록 가열찬 열기를 감내해주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 뽀얀 국물이 우러나와 진국이 가득해질 때까지. 자신의 품에서 또 다른 일상이 단단해질 때까지.

 가마솥과 함께 십 년 가까이 땀을 흘리자 마침내 일상이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나도 조금은 가마솥을 닮아있었다. 가마솥처럼 기꺼이 삶을 품고 세상의 불길을 인내하며 일상을 지켜낼 용기가 생겼다.

 붕어빵틀이 한 바퀴를 도니 열 마리의 붕어빵이 구워졌다. 내 뒤로 서너 사람이 줄을 섰다. 나는 무척이나 조바심을 내는 뒷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했다가 맨 뒤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붕어빵이 어서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똑같은 붕어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내 앞의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그들의 일상 속으로 사라졌다. 그 따뜻한 봉투를 받아드는 순간만큼은 모두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행복은 유명한 빵집에 차려진 화려한 빵들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보다 가치 있고 다양한 삶을 원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일상이 받쳐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남과 다르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때로는 남과 다르게 똑같은 일상을 산다는 것이 작은 행복이 될 떄도 있다. 비록 개성은 없지만 하나나 열이나 똑같은 저 붕어빵처럼 말이다.

 빵틀이 한 바퀴를 더 돌자 내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여인은 나의 양보가 고마웠는지 덤으로 두 마리나 더 담아주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서툰 솜씨를 탓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손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하루하루 빵틀을 돌리며 열심히 일상을 구워낼 것이다. 날이 갈수록 솜씨도 늘 것이다. 무엇이든 함께 하면 닮기 마련이다. 그녀 역시 단단하면서도 은근하게 열기를 품어주는 무쇠의 내공을 배워갈 것이다. 따뜻한 봉투를 안고 돌아서는데 그녀의 어설픈 손길에도 철커덕 붕어빵틀이 돌아가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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