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살래 / 김응숙

희라킴 2020. 3. 26. 17:26

  살래 김응숙 그것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 한 올 날리지 않는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앞섶을 여미었다. 먼 세월의 저편에서 묵직하게 밀려오는 조류 같은 바람이었다. 마치 만조처럼 그 바람은 내 무릎을 적시고 가슴까지 차올랐다.

 현관 앞에서 돌아가는 택배아저씨에게 나는 차마 집안까지 들여놓아 달라고 부탁하지 못했다. 나무 찬장이라고 하던데 혼자 힘으로 들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인연으로 제주도에서 보내온 물건이었다. 내가 첫 수필집을 발간한 즈음이었는데,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는 선물이어서 한사코 사양을 했지만 그것은 기어코 내 앞으로 배달이 되고 말았다. 물건에도 거부할 수 없는 인연이 닿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숨을 멈추고 힘껏 들어 올리자 덜렁 바닥에서 몸을 뗐다. 테이프를 뜯고 박스를 벗겨내자 뽁뽁이 비닐이 한 겹을 더 둘러싸고 있었다. 그 비닐마저 풀어내니 자그마한 체구의 나무 이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부터 제주도 부엌에서 찬장으로 쓰였던 ‘살래’라고 했다.

 순간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 묵직한 바람이 내 가슴을 밀치고 지나갔다. 한 오백 년은 산 할망 같았다. 깊은 주름살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왠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잠시 몸을 외로 틀고 있다가 살래 앞에 두 무릎을 끌어안고 마주 앉았다.

 이층장 문짝마다에는 골골이 패인 주름이 가득했다. 간혹 오래된 나무판자에 자연적으로 양각된 결은 보았지만 이렇게 모질게 주름으로 덮인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아예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손톱만한 편편한 자리도 찾을 수 없었다. 제주의 바람에 살이 발리고 바싹 마른 문짝에는 뒤틀리며 패인 상처 같은 주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작은 틈새가 질곡처럼 다가왔다. 나무에게 뼈가 있다면 아마도 주름위로 심줄처럼 도드라진 저 무늬들일 것이다. 나는 갑자기 숨쉬기가 거북해졌다.

 게다가 찬장 상판은 마치 나무 화석 같았다. 그 작은 나무판이 어둠에 잠긴 제주 바닷가의 넓은 바위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 바위도 편안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패이고, 닳고, 모서리는 깨져 있었다. 이리저리 기울고 거친 암갈색의 상판이 억겁의 세월이라도 건너온 듯 아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밀도 높은 바람이 다가왔다.

 일 년에 한 바퀴, 태양의 주위를 돌아야하는 시간에게서는 늘 바람의 냄새가 난다. 바람은 시간을 실어 나르고, 모든 바람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시간들이 그 시간을 관통한 사물들에 켜켜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제주의 바람은 살래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긴 것 같았다.

 굳이 한반도의 역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척박했던 그 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오랫동안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식들을 끌어안고 살아남아야했던 어미들의 삶에 있어서야. 먹고 살아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명제와 맞닿아있는 살래 앞에서 나는 제주 어미들의 패이고 갈라진 가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눈꺼풀이 뻑뻑해지고 두터운 어둠이 내 눈앞을 가렸다.

시장통 불빛이 하나 둘 꺼지자 사방이 깜깜해졌다. 행인들도 뚝 끊겼다. 버스정류소 표지판 앞에서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다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사방이 진공이 된 것처럼 적막해지고 문득 정류소에 나 혼자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제야 붉은 후미등을 흔들며 아스라이 멀어지던 바로 앞 차가 막차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장통을 거쳐 보리밭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산 아래에 있는 집까지, 열네 살의 나는 가로등도 없는 밤길을 걸었다. 내 발 밑에서 어둠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잠든 동생들이 깰까봐 조심스레 부엌문을 열었다. 깜깜한 부엌에 앉아있는 찬장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간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린 이층 찬장이었다. 수도도 없고 부뚜막도 없는 부엌 한 구석, 석유난로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찬장. 나는 그 찬장을 열어보았다. 국수가 반 다발 가량 남아 있었다. 마지막 양식이었다. 다시 깜깜한 어둠이 내 눈앞을 막아섰다.

 그때의 어둠은 너무도 깜깜해서 그 후의 일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타지로 돈 벌러 떠난 아버지를 찾으러 간 엄마가 얼마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에 없다. 집과 정류장, 왕복 이십 리가 넘는 밤길을 얼마나 걸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나와 동생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얼마나 굶었을까. 나는 도무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엄마가 돌아왔어도 찬장은 채워지지 않았다. 언덕 아래 쌀가게에서 외상을 긋고 가져온 봉지쌀은 찬장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바닥을 보였다. 옆집 할머니에게 빌린 국수다발은 엄마 몫을 삶지 않아도 찬장에 남아있지 않았다. 간혹 잔돈푼을 찬장 구석에 감춰 놓았지만 그것은 결코 찬장 속에서 목돈이 되지 못했다. 그 세월 속에서 엄마의 가슴은 패이고 갈라지고 말라버렸다.

 깊은 병을 얻은 엄마는 겨우 오십을 넘기고 돌아가셨다. 이사를 가면서 찬장은 버려졌다. 이미 바닥은 내려앉고 문짝이 뒤틀린 뒤였다. 끝내 한 번도 속을 채우지 못했던 우리 집 찬장은 그렇게 사라졌다.

 살래의 문을 열어보았다. 텅 빈 가슴에 어둠이 고여 있었다. 손을 넣어 더듬어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이 살래가 내게 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황급히 일어나 내 수필집 한 권을 가져와 살래의 가슴에 넣고 문을 닫았다. 내가 엄마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살래를 햇살이 잘 비치는 거실 창가에 놓았다. 예쁜 화분도 하나 올려놓았다. 햇살이 살래의 상처 사이로 스며들었다. 주름투성이의 살래가 조금씩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씻고 다시 바라본 살래는 햇살 아래에서 너무나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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