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분꽃 / 이혜연

희라킴 2020. 5. 12. 18:53



분꽃 


                                                                                                                            이혜연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들이 있다. 질화로 속에 담긴 불씨처럼 그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 앉아 자칫 냉랭해지려는 내 삶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 넣어주곤 하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때론 선명한 윤곽을 지닌 실체로, 때로는 안개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불현듯 그리움은 다가온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리움의 대상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새로 밝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져 가기 때문일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귀소본능처럼 자꾸만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고만 한다. 화사한 봄보다는 까칠해진 가을에, 빛을 여는 아침보다 빛을 거두어들이는 어스름 저녁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 어스름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도 같은 그리움을 주는 꽃이 있다. 목을 뽑아 올린 긴 기다림 끝에 저녁 이내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나버린 내 유년의 꽃, 분꽃이다.

  분꽃은 한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하룻밤 무서리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리는 다년생 풀꽃이다. 하지만 풀꽃답지 않은 굵고 붉은 대궁이가 당차 보이면서도 한편 그 줄기의 뻗음새가 제법 운치를 느끼게 할 만큼 멋들어지다. 밋밋하게 치솟는 여느 풀꽃과는 다르게 마디마디 살짝 틀어 절묘한 각도를 이루어내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절지화를 보는 듯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갸름한 하트형의 잎사귀를 이웃하고 피어나는 꽃송이는 이런 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양, 노랑, 진분홍, 점박이, 줄무늬와 같은 다양한 색상을 띠고 마치 팡파르를 울리는 작은 트럼펫마냥 사방으로 엇갈려 피는 꽃송이는 차라리 연약한 느낌이다. 흡사 나팔꽃의 축소판이다. 그러나 나팔꽃과는 피는 시각도 다를뿐더러 분위기도 판이하다. 아침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나팔꽃이 생기발랄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면, 저녁 이내와 더불어 피는 분꽃은 지분 냄새 은은히 풍기는 성숙한 여인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해바라기 같은 열정도, 장미꽃 같은 요염함도, 달맞이꽃과 같은 처연함도, 코스모스나 들국화와 같은 청초함도 없다. 그저 소박하고 편안한 모습일 뿐. 그러나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꽃들이 주는 소박함과는 다른 멋이 분꽃에게는 있다.

 바람처럼 떠돌다가 어느 날엔가는 찾아들 지아비를 그리며 저물녘이면 살며시 매무새를 다듬어보는 아낙. 긴 밤 별을 우러르며 기다림에 애를 태우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그만 그리움을 접어 가슴에 묻고 마음 추슬러보는 여인. 그러나 체념과 기다림의 되풀이 끝에 그리던 임 돌아와도 원망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슬며시 돌아서 눈물 글썽이는 순박한 여인네 같은 꽃. 그 돌아서는 옷깃에서 얼핏 풍기는 은은한 향내…

분꽃에서는 어쩐지 시집 간 언니 혹은 젊은 날의 우리네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가 느껴진다. 당차고 검박한 살림꾼이면서도 저녁이면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다가앉는 여인일 수밖에 없는 꽃. 살포시 내민 꽃술은 그리움에 애태우는 여인의 속눈썹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애잔한 느낌을 준다.

 분꽃에 유달리 정이 가는 것은 비단 내 유년의 추억이 어려 있어서만은 아니다. 저녁에 피어 아침에 지는 그 속성에 기다림과 체념의 미학이 있고, 무서리가 내리기까지 끊임없이 피워내는 그 줄기찬 생명력과,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향기, 소박한 모습에서 이제는 사라져가는 한국인, 특히 한국여인의 정서인 은근과 끈기를 느낄 수 있어서라면 지나친 말이 될는지.

마지막 정염을 태우며 석양이 진다. 마을 어귀를 감돌던 매캐한 연기는 옛 이야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지만, 돌확 옆에 자릴 틀고 앉은 분꽃은 오늘도 예나 다름없이 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한다.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그 가녀린 목줄기 속에서 저녁참 동네 골목을 메아리치던 어머니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야! 밥 먹어라.”

자력에 끌리듯 목소리를 따라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버린 골목길은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적막감에 빠져들고, 여기저기 놀이의 흔적만이 쓸쓸히 남는다. 사방치기 하던 돌멩이, 땅따먹기로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길바닥, 그리고 넓적한 돌멩이 위에 소꿉놀이로 짓이겨진 풀잎의 푸른 물, 하얀 가루….

까맣게 잘 여문 분꽃 씨앗 하나를 따 본다. 지구의처럼 생긴 둥글고 단단한 껍데기를 손톱으로 헤집으니 작은 알맹이가 오롯이 들어 앉아 있다. 얇은 속껍질을 조심스레 마저 벗겨내자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손등에 대고 문질러본다. 군데군데 분꽃가루로 하얗게 얼룩진 소꿉동무의 둥근 얼굴이 손등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엄마가 되겠다고 하얗게 분칠한 친구의 얼굴이.

 스르르 눈을 감고 꽃술 가까이 코를 대 본다. 어린 시절 칭얼거리며 몸을 휘감던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풍기던 은은한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가슴이 훈훈해진다. 나도 과연 내 아이의 기억 속에 우리 어머니와 같은 그런 향긋한 체취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분꽃 하나를 따 든 채 어둠이 내리고 있는 골목길로 내 아이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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