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게 헌사(獻詞)를 / 민명자 손에게 헌사(獻詞)를 민명자 나는 손입니다. 나의 주인이 태어날 때 이 세상에 함께 와서 평생 일심동체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왔지요.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나는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하고 조아리며 충성을 바쳤답니다. 나는 주인과 운명공동체이니 주.. 좋은 수필 2020.02.29
달고 뜨거운 / 고지숙 달고 뜨거운 고지숙 눈송이가 떨어진다. 얇은 외피에 비해 낙하 속도가 빠르다. 손등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녹는다. 다음 그 다음의 눈송이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손등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서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이 들.. 좋은 수필 2020.02.14
2월 / 서성남 2월 서성남 새벽 새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달이 2월이다. 어느 달보다 많이 지저귄다. 그 소리는 영하의 날씨를 뚫고 맑기도 하다. 집수리 중인 까치들은 둥지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상대를 부른다. 높지 않고 부드럽다. 여럿이 토론하듯 날카롭게 짖는 것과는 달리 온화하다. 다른 새들도 .. 좋은 수필 2020.02.13
황혼 / 설소천 황혼 설소천 석양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저토록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내 눈에만 그럴까. 말없이 저무는 것에 대한 고통을 잠시 엿보았던 때문일까. 구순이 까까운 사람 중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가게 오.. 좋은 수필 2020.02.09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 맹난자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맹난자 겨우내 나는 조바심을 치면서 진달래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조화 속인지 이번 봄에는 진달래꽃 빛깔의 재킷도 하나 장만했다. 그런 빛깔에 익숙하지 않아 선뜻 꺼내 입지도 못하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봄을 지냈다. 무슨 현상.. 좋은 수필 2020.01.28
을의 시대 / 노현희 을의 시대 노현희 “많이 기다렸지? 미안, 속상해 죽겠어.” 약속 시간보다 늦은 시각에 나타난 그녀는 내게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어쩜 저리도 안온한 인생이 다 있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낯선 단어가 튀어나온 거였다. “왜? 무슨 일이야?” 나는 필.. 좋은 수필 2020.01.26
집 / 최장순 집 최장순 산허리가 시원하다. 강을 끼고 바라보는 전경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은 강 깊숙이 제 그림자를 새기고, 건너편 산자락에 깃든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느릿한 철새들 뒤를 잔잔한 파문이 따라간다. 거실 창으로 여유로운 화폭이 전개된다. 산과 마을과 강을 바라보며 생각.. 좋은 수필 2020.01.16
노란 서점 / 김인선 노란 서점 김인선 늙으면 햇살 잘 드는 공터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로 서점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판매를 하진 않을 테니 정식 서점은 아니겠고, 굳이 용도를 말하라면 책 읽는 어른들의 문화공간이라 할까. 다 늙어서 웬 책이냐고 물어오면, 세상 이야기 두루두루 나누.. 좋은 수필 2020.01.14
내 안의 빈집 / 심선경 내 안의 빈집 심선경 해거름에 나선 뒷산 산자락에 쑥부쟁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숲 속 산책로의 가래나무 가지 사이, 낯선 거미집 하나가 달려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불안한 시선을 조심스레 그물망에 건다. 무심코 날다 걸려들었을 큰줄흰나비가 망을 벗어나려 파닥거린다. 그물.. 좋은 수필 2020.01.12
다시 봄, 장다리꽃 / 이순혜 다시 봄, 장다리꽃 이순혜 다시 봄이다. 행여 뒤질세라 초목들의 푸른 숨결이 다투어 들판으로 번진다. 밭두렁 여기저기 키 작은 애기똥풀의 눈망울이 말똥하다. 밭이랑에는 샛노란 꽃이 산들바람에 남실거린다. 장다리꽃이다. 긴 대롱 끝에 말긋말긋한 미소들, 장다리꽃이 맑은 얼굴로 .. 좋은 수필 202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