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다시 봄, 장다리꽃 / 이순혜

희라킴 2020. 1. 9. 20:12

                              

                                                               다시 봄, 장다리꽃


                                                                                                                                            이순혜



 다시 봄이다. 행여 뒤질세라 초목들의 푸른 숨결이 다투어 들판으로 번진다. 밭두렁 여기저기 키 작은 애기똥풀의 눈망울이 말똥하다. 밭이랑에는 샛노란 꽃이 산들바람에 남실거린다. 장다리꽃이다.

 

 긴 대롱 끝에 말긋말긋한 미소들, 장다리꽃이 맑은 얼굴로 자랑을 하는 듯하다. 살을 에는 한파도 소름 돋는 꽃샘바람도 다 이겨냈다고, 머지않아 장다리꽃은 씨방을 짓고 그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는 대를 이어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겨우내 돌보지 않아 밭이 어수선하다. 무엇부터 시작할까 밭을 돌아보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비가 장다리꽃을 이리저리 살핀다.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새참을 들고 온 식구가 밭에 나갔다. 아버지는 쟁기질로 흙을 북돋아 이랑을 만들고 어머니는 호미질하며 뒤를 따랐다. 언니와 나는 처음에는 돌을 고르다가 두꺼비집을 지으며 놀았다. 아버지는 해가 빠지기 전에 마쳐야 한다며 고사리손을 다그쳤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다락에 감춰진 간식의 유혹에 넘어갔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서야 땅거미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늘 흙냄새가 났다.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머릿수건으로 투닥투탁 옷을 때렸다. 옷에 달라붙은 노동의 흔적은 아무리 털어내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땀에 젖어 거덕거덕해진 옷을 빨면 흙물이 누렇게 배어 나왔다. 버선과 몸빼엉덩이에 묻은 오래된 얼룩은 비비고 주물러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작물을 수확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밭이랑에 서면 무와 배추가 만들어내는 초록빛 향연은 여기가 밭인지 바다인지 멀미를 일으키게 했다. 어머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이랑으로 들어가 작은 일손을 보탰다. 작물을 일일이 손으로 뽑아 리어카에 실어 날랐다. 두둑하게 실은, 내 키를 훌쩍 넘긴 채소는, 리어카를 끄는 아버지를 삼키려 했다. 울퉁불퉁한 밭두렁에서 아버지는 리어카 따라 휘청거리며 손에 땀을 쥐는 곡예를 하루에도 서너 번을 했다.


 어머니의 재바른 손은 수돗가에서 빛을 발했다. 시금치 옆에 삐져나온 떡잎을 뜯고 무와 배추는 보기 좋게 단으로 묶었다. 인근 장터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어머니의 주머니에 천 원짜리가 불룩했다. 그 돈은 우리들의 공납금이 되었다.

 

 결혼 후, 친정에 갈 때마다 풀뿌리 달인 물을 보았다. 어머니는 소화에 좋다는 것을 이것저것 넣어 달였다. 나는 그것이 보약이라 여기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시렁 안에 마시는 소화제가 몇 상자나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속이 안 좋으면 어머니는 소화제 한 병으로 달래고 있었다. 병원에 가기를 권하자 지레 손사래를 쳤다. 매일 일 속에 묻힌 어머니는 쉽게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몸속에 못된 것이 자라고 있었다. 위암 말기라고 했다. 항암 주사는 방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암세포가 더는 번지지 않았지만, 몸은 앙상해지고 주름진 얼굴은 더욱 골이 깊어 보였다.

 

 “야야, 이맘때는 김장용 배추, 무를 심어야 하는데.”

 

 어머니 몸에는 죽음이 번지고 있는데 밭을 먼저 생각하다니, 몸부터 챙기라고 말하면 어느 집이든 밭을 놀리면 동네 사람들이 입 댄다.”라며 걱정을 한술 더 떴다. 골짜기 외진 밭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데, 주인마저 돌아보지 않으면 땅이 기운을 잃을까 싶어서였다. 흙에 살다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뼈를 묻을 작정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어머니 대신 밭에 나갔다. 일머리가 없지만, 내친김에 배추와 시금치까지 심어 볼 요량이었다. 서툰 농사꾼에게 밭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잡초 뿌리가 호미를 낚아채고 돌부리에 걸려 호미자루를 놓치기 일쑤였다. 하나하나 손으로 다스리다 보니 온몸이 쑤셨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면 뼈마디가 소리를 냈다.

 

 노동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날이 연둣빛은 밭이랑을 물들였다. 푸른 물결이 넘실댈 즈음 어머니를 모시고 밭에 갔다. 어머니의 눈빛이 또렷해지고 빨라진 걸음은 달려가듯 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손으로 무와 배추를 쓰다듬으며 야들도 땅 주인을 아는 갑다.” 주인의 발소리를 알아챈 작물들이 일제히 얼굴을 돌렸다.

 

 밭이랑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솎고 김매고 북주고 순지르는 동안 장대비와 된바람이 몇 차례 다녀갔다. 중심을 일으켜 제 터를 잡아주자 무는 땅속에서 배추는 밖에서 몸피를 불려갔다. 토실해지는 배추는 속이 잘 여물 수 있도록 끈으로 묶어 주었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서도 밭에 나왔다. 땅은 주인의 손길을 느끼고 작물은 발소리를 용하게 알아챈다고 땅심과 작물을 헤아려 보란다. 초보 농사꾼이 못 미더운 어머니는 소소한 것까지 일렀다. 그 덕분인지 가을에는 한 해 농사를 잘 갈무리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기력이 뚝 떨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정리하듯 이것저것 세심하게 챙겼다. 밭은 당신이 온 생을 다 바쳐 일구어낸 작은 영토였다. 나만 보면 땅을 놀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당신의 땅이 묵정밭이 되지나 않을까, 날마다 걱정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푸석해지기 시작했다. 꽃을 피웠고 자식에게 짝을 지워주었으니 이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기운을 잃어갔다. 목이 타고 피가 마르는 고통이 왔지만, 순리라고 받아들이며 하늘의 뜻에 맡겼다. 손돌이바람이 불 즈음 어머니는 가녀린 숨소리 몇 자락만 내뱉고 홀연 하늘로 날아갔다.


 어머니의 영토를 일군 지 몇 년째다. 지금도 밭에서 일하면 미주알고주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린다. 호미는 이렇게 바투 잡고, 비닐을 이렇게 덮어라, 큰비 오기 전에 고랑을 터라. 하늘에서 어머니는 서툴고 굼뜬 농사꾼을 내려다보며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도 밭에는 무 배추가 여기저기 남는다. 돌보는 이 없는 무 배추는 홀로 삭풍의 시간을 참아낸다. 이윽고 언 땅이 풀리면 푸석해진 몸으로 남은 힘을 다해 줄기를 밀어 올린다. 샛노란 꽃을 피우고 그 자리에 씨방이 맺히면 부스스 스러져 한 줌 거름이 된다.

 

 당신의 삶은 돌보지 않고 자식을 위해 온몸을 바친 어머니, 그 뜻을 내 마음의 씨방에 저장한다. 나 또한 자식을 키워내는 어머니이므로.

 

 계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쟁기를 잡는다. 머지않아 어머니의 땅에는 장다리꽃이 밭이랑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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