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을의 시대 / 노현희

희라킴 2020. 1. 26. 19:50


을의 시대


                                                                                                                                노현희



  “많이 기다렸지? 미안, 속상해 죽겠어.”

  약속 시간보다 늦은 시각에 나타난 그녀는 내게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어쩜 저리도 안온한 인생이 다 있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낯선 단어가 튀어나온 거였다.

  “왜? 무슨 일이야?”

  나는 필요 이상의 높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겠어. 딸네 도우미 아줌마 때문에 그러지.”

 뭐겠어, 란 말은 내 야릇한 호기심을 단숨에 차단시켰다. 자신에게 뭔 일, 이란 것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뭐겠어, 였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는 역시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상태의 이야기였다. 눈만 끔뻑이는 나를 향해 그녀가 다시 말했다.

  “요즘 을의 갑질 때문에 속상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손주를 봐주는 육아 도우미가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해서 통사정을 해서 겨우 붙잡아두느라 늦었다는 그녀의 말속에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백만 원 이상을 주고 숙식 해결에,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휴가까지 주는데 그만두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아니 그 이유라는 게 뻔하다는 거였다. 결국은 돈, 이라 했다.

 

 을의 갑질. 을은 권력을 쥔 갑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만 하는 그런 수동적 처지가 아닌가. 그런데 그 을이 갑질을 해서 갑이 속상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을이 받는 대우가 적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당당한 태도를 보며 그녀의 을이 느꼈을 무엇을 본 것 같았다. 을끼리 아는 을만의 마음이었다.

 “시급받는 사람이 무슨 갑질씩이나.”

 시큰둥한 내 반응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을의 갑질 사례를 늘어놓았다. 도우미가 지칭한 육아용품이나 전자제품을 준비하는 건 기본이며, 멀쩡한 것이 있어도 도우미가 사용법을 모른다고 난색을 표하면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거부하면 일을 맡지 않으려는 경우까지 있단다. 육아 도우미는 집 안에 먼지가 굴러다녀도 못 본 척할뿐더러 음식도 아기 이유식만 만든다고 했다. 심지어 주인이 내어놓은 반찬을 먹으며 맛을 평가하기도 한다고 했다. 귀한 자식에게 행여 해가 갈까 을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자괴감마저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했다.

 “어쨌든 육아 도우미 시장에서만큼은 갑의 자리는 언제나 도우미야.”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명랑해져 있었다. 그녀의 을은 그녀가 말하는 ‘그 돈’에 정말 주저앉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을이 갑질을 멈추고 그녀의 손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하는 사람으로 돌아가리라는 확신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그녀의 을에게 그 돈은 그저 그녀가 생각하는 단순한 돈, 그건 아닐 터였다. 그녀는 맛있는 밥집을 안다며 앞장을 섰다.

 

 도우미가 갑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나는 그녀를 좇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권력이나 특별한 재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노후를 여유롭게 맞이할 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 있었고, 탈 없이 자란 자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건강에 적신호가 울리기는 했으나 경각심을 살짝 일깨우는 정도였다. 그녀는 그런 삶에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는 한 이웃일 뿐이었다. 그녀에게선 언제나 그 별 탈 없는 일상을 만족하는, 평온함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 평온함이 내게 그녀를 갑으로 보게 한 것인지 몰랐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주눅이 들곤 했다. 상대적 결핍감을 떨쳐내지 못한 자는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을이 했다는 갑질도 결핍감의 다른 이름일 것 같았다.

 

 가진 게 많은 자는 항상 을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자신은 약자, 라고 했다. 가진 걸 지키기 위해서는 을의 반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하고, 늘 긴장 속에 살아간다고 했다. 그에게 을이란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존재라 했다. 그녀처럼 그도 을들이 원하는 건 더 나은 보수, 뿐이라 했다. 경영 이익이 나서 받게 되는 특별 보너스는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물이며, 어려운 회사 상태는 경영진의 실책이라는 명확한 선 긋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그때도 나는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확신이 차 있었고, 자신들의 경험에서 나온 을에 대한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내게도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약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 시늉을 내기도 했다. 어쨌든 약자라고 지칭한 그는 곧잘 어려운 이들을 도왔고, 크고 작은 모임에서 밥이나 차를 샀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느낄 때는 누구보다 크게 화를 냈고 냉정했다. 가끔, 사람들은 그게 왜 상처가 되는 거지, 라며 그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말하는 갑질하는 을 이야기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가족을 간병인에게 맡긴 어느 보호자는 문병 갈 때마다 당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했다. 한 번씩 간병인의 간식이나 선물 따위를 챙겨주다 보니 간병인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먼저 향한다고 했다. 새 며느리를 들인 어느 댁은 아들 내외가 오는 날이면 대청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둔다고 했다. 그들은 세상이 달라졌다, 고 했다. 내 돈을 쓰면서도 눈치 보는 세상이라 했다. 그럼에도 간병인은 종일 가족을 기다리는 환자를 이야기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들려주는 반찬은 당신 아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했다. 그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반찬 몇 가지로 며느리 기죽이려 드는, 갑들의 행태라 했다. 그 어디에도 갑의 목소리는 없고, 을의 하소연만 흘러나왔다. 


 도대체 갑은 누구일까.


 을이 없으면 갑도 없다. 마찬가지로 갑이 존재하지 않으면 을이란 이름도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갑의 갑질, 을의 갑질 같은 암투적인 말이 오가고, 을의 을질 같은 비하의 말도 나온다. 갑을이 수직의 관계로 움직일 때 ‘질’이라는 접미사는 폭력성이 가미된 권력이 된다. 갑질하는 갑이나 갑질하는 을, 을질하는 갑이나 을질하는 을, 이 모두 술수나 자기 비하라는 덫에 갇힌 자다. 그 어떤 것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갑이다. 그러지 못한 자는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다.

 

 을의 시대, 란 말이 반목의 상태에 빠진 사회를 말하는 게 아닐 수는 없을까. 을이 정말 사회적 약자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을의 시대란 을이 마음 편하게 사는 사회일 것이다. 지각없는 갑의 갑질도 모자라 어쩌다 갑이란 완장을 찬 을까지 판을 치는 사회, 그들을 견제하는 건강한 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올해에는 선거가 있다. 각 곳의 수장 자리를 두고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갑중의 갑이라는 그 수장 자리를 두고 그들은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을을 섬기겠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는 그들의 혀끝에 발린 말에 많이도 속아왔다. 누군가는 무지한 을들의 자업자득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수장의 자질 문제라 했다. 그놈이 그놈이라며 외면하기도 한다. 일순간의 분노나 포기로 을의 자리를 놓아버릴 때 우리의 삶도 그놈, 에 휘둘리고 만다. 이번만큼이라도 그들의 목소리가 갑의 을질이 아닌, 을의 삶을 진정 함께하는 갑다운 갑인지 분별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게 을이 할 일이다. 그런 을이 진정한 갑을 만든다.


 뉴스에는 어제도 오늘도 갑질에 병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권력자도 자산가도 지도층 인사도 을임을 하소연하는 시대다. 오늘 날의 뉴스는 늘 피해자를 양산하고 선동한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진정, 갑이 을을, 을이 갑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시대는 요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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