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황혼 / 설소천

희라킴 2020. 2. 9. 19:20

  황혼 설소천 석양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저토록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내 눈에만 그럴까. 말없이 저무는 것에 대한 고통을 잠시 엿보았던 때문일까.

 구순이 까까운 사람 중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가게 오랜 단골인 이천댁과 섭이 할매는 그렇다. 내가 처음 가게를 시작한 때부터 두 분을 알고 지냈으니 수십 년 세월만큼 안면이 두텁다. 이웃에게 듣기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동네로 시집왔다고 한다. 평생을 제 자리에서 동네를 지켰으니 마을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천댁은 누가 봐도 복 많은 사람이다. 부잣집 맏며느리에 살림은 풍족했고 자식들은 건강했다. 잘 자란 자식들이 공부도 잘해 남들은 삼수, 사수해도 어렵다는 대학을 힘들이지 않고 척척 붙었다. 이웃들은 그런 이천댁을 보면서 전생에 무슨 덕을 그리 많이 쌓았는지 농담 삼아 묻곤 했다. 영감님 살아생전 금슬은 또 얼마나 좋았던지. 영감님은 홍시를 좋아하는 이천댁을 위해 뒷마당에 손수 감나무를 심었다. 가을이면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이천댁의 또 다른 자랑이었다. 깊어가는 영감님의 사랑에 잘나가는 자식에 이천댁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 남 부러울 게 없었다. 날이 갈수록 뻣뻣해지는 이천댁을 사람들은 감나무 집이라 불렀다.

 섭이 할매는 그저 그렇다. 스무 살 나이에 상처한 남자의 후처로 들어왔다. 전실 자식에 소생까지 육남매를 애면글면 키웠다. 영감님은 살아생전 말 없는 부처님으로 통했다. 성품이 진중했다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섭이 할매는 우리 가게에서 여러 번 엉킨 속을 풀었다. 잘은 모르지만, 집 살림에 무심한 영감님이 꽤나 야속한 모양이었다. 기어드는 목소리에 꿍얼꿍얼 울음 섞인 푸념이란… 한참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절로 쌈지에 꽂힌 바늘로 옮겨갔다. 꽉 막힌 체중을 뚫듯 저 풀 길 없는 답답한 가슴을 단번에 확 뚫어주면 좋을 텐데. 한쪽 뺨을 덮은 섭이 할매의 붉은 점을 보면서 항상 생각했다.

 세탁물을 맡기는 이천댁의 첫 마디는 늘 한결같다.

 "이거 비싼 옷이다. 잘못하면 알제."

 한 번도 빼 먹지 않은 말이라 나도 으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사실 이천 댁이 맡긴 옷은 대부분 유명한 브랜드다. 이렇게 값비싼 옷은 먼저 내 쪽에서 알아주어야 하는데 소갈머리 없는 내가 그것을 못 했다. 그래선지 늘 비싸다, 비싸다. 습관처럼 말하는 것 같았다. 팔순하고 중반을 넘긴 이천댁은 허리 하나 굽지 않고 나보다 계산도 빠르다. 간혹, 자식 있는 서울로 안 가시나요? 물어 보면 아들은 오라고 난린데 내가 안 간다. 단호하게 말했다.

 세탁물을 갖고 온 섭이 할매는 자주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혼자인 아들은 일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한 번도 옷이 말짱할 때가 없다. 재봉틀에 앉아 찢기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너덜해진 섭이 할매의 속내를 짐작해본다. 어미에게 허술한 자식은 가슴에 난 커다란 구멍이다. 이 모양 저 모양 싸매려고 얼마나 남모르게 애를 태웠을까. 등이 굽은 섭이 할매를 보며 자식을 겉 낳지, 속은 못 낳습니다. 말해 주고 싶었다.

명절이 지난 어느 날, 이천댁이 보조보행차를 밀며 가게 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발길이 끊겨 궁금했는데 그새 이천댁의 다리가 조금 불편해 있었다. 이것저것 안부를 묻는 나에게 이천댁이 상의를 건네며 전에 없는 말을 했다. 대충해라, 대충.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뜬금없는 말도 했다. 상품권이 집에 많은데, 백화점에 같이 가면 좋겠는데. 나는 갑작스런 말에 별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하게 헛웃음만 지었다. 이천댁은 가게를 나가면서 몇 번 또 나직이 중얼댔다. 사람이 없다. 사람이.

온 동네가 벌집을 쑤신 듯 술렁거렸다. 구급차와 경찰차의 사이렌이 요란하게 감나무 집 담장을 울렸다. 경로당에서 나오는 할머니들은 너나없이 발을 동동 굴렀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천댁이 감나무에, 감나무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한 동네에 온갖 소문이 광충처럼 휘돌아다녔다. 내 머릿속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하던 이천댁의 말이 계속 메아리쳤다. 며칠 힘들었다. 점차 소문이 잦아들고 마음의 동요도 잠잠할 즈음 감나무 집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섭이 할매는 불쑥불쑥 우리 가게를 찾는다. 맡긴 옷이 없음에도 찾으러 오고 찾아간 옷도 재차 찾는다. 이웃들은 가벼운 치매라 입을 모은다. 언젠가부터 섭이 할매는 내게 통장을 보여줬다. 노령연금이 나오는 날에 맞추어 자잘한 공과금 해결을 부탁한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밥숟가락 뜨다가도 그게 먼저다. 그냥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온 동네를 덮었다. 내 눈길은 아직도 창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천댁과 섭이 할매가 뇌리에서 겹쳐진다. 무심한 시간은 언제 이렇게 흘러 한 사람은 황혼 속으로, 한 사람은 석양의 끝자락에 다다랐을까. 이천댁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그 모습 그대로 조금만 더 크게 말해주지. '사람이 없다. 사람이.' 하던 마지막 음성을 내가 조금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해주지. 우매한 사람이 바쁘다는 핑계도 서먹하다는 변명도 미처 할 수 없게 말이다. 어차피 이천댁이 내게 원했던 건 그저 짧은 동행이었을 뿐이었는데.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고 욕심껏 머물 수도 없는 이 땅에서. 누구나 세월의 더께가 더할수록 점점 제 몸 하나도 버거워지는데. 보잘것없는 먹먹한 가슴으로, 가벼운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그래! 내일은 섭이 할매의 굽어진 등을 힘껏 오래 안아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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