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시루 / 황진숙 옹기 시루 황진숙 저라고 그리 생긴 게 좋기나 할까. 편평한 바닥과 넓은 아가리로 마냥 품고 싶었겠지. 동이 안의 물이 탐이 나 빗물을 받아 보기도 하였다. 가둬 둘 새 없이 빠져 나가버리는 물이 허허로웠다. 가려 주는 뚜껑 없이 구멍 난 바닥은 매나니의 삶이었다. 장독처럼 맛을 품는.. 좋은 수필 2019.09.03
초상화 / 박연구 초상화 박연구 어느 날 아내와 같이 육교 위를 지나다가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을 하나 샀다. 아내가 옆구리를 툭 건드리면서 저거 하나 사자고 해서 돌아보았더니 손톱깎기·주머니칼·구두주걱 등을 길바닥에 놓고 파는 가운데 대나무로 만든 등긁이(노인들의 등을 긁는 데 쓰이는 기.. 좋은 수필 2019.08.27
가을, 소리에 귀 기울이다 / 조현미 가을, 소리에 귀 기울이다 조현미 사위가 수족관 속 물때처럼 가라앉을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미끌미끌한 잠의 수역으로 막 입수하려는 참, 이만큼 다가와 있던 피안이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수면 즈음에 울리는 벨소리가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불면증에 시달려 본 사람은 안다. 제아.. 좋은 수필 2019.08.23
아버님의 마지막 ‘스버’ / 이난호 아버님의 마지막 ‘스버’ 이난호 시아버님의 사투리엔 생판 처음 듣는 게 몇 있었다. 그마저도 어조가 높낮이 없이 나직하시어 혼잣말씀인가 흘리기 일쑤였다. 당신 의중을 드러내실 때도 거두절미 낱말 몇 개로 압축하시고는 두 번 채근하시는 법 없고 말씀의 향방도 늘 모호했지만 ‘.. 좋은 수필 2019.08.23
주인 없는 꽃수레 / 변해명 주인 없는 꽃수레 변해명 일요일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성당 입구에서 한 걸인과 만난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숙이고 쭈그리고 앉아 동냥 그릇을 들고 있는 걸인은 벌써 몇 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그 걸인을 볼 때마다 Y가 떠오른다. 걸인의 .. 좋은 수필 2019.08.15
자두의 계절이 돌아왔다 / 김정화 자두의 계절이 돌아왔다 김정화 일 년을 기다렸다가 먹는 과일이 있다. 딸기의 계절을 거쳐 수박과 포도의 배릿함을 가로지르고 오는 어질어질한 향이다. 풋여름 노을빛을 닮은 색, 한 입 베어 물면 코끝이 찌릿하고 눈허리가 시어온다. 그 과육은 혹독했던 입덧의 기억까지 소환시키는 .. 좋은 수필 2019.08.08
뒷골목 / 김응숙 뒷골목 김응숙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다. 밤이라면 그것은 체념의 시간이 흐르는 너절한 도랑이 되고 비까지 온다면 허무가 떠다니는 오염된 하수구가 된다. 늦가을 찬바람마저 불어대는 오늘, 화장 짙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비는 번들거리는 얼룩을 남기며 어두운 골목을 .. 좋은 수필 2019.07.28
은화 / 반숙자 은화 반숙자 멀리서 종소리가 울린다. 뎅뎅 뎅 데엥…….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해서 일손을 놓을 때가 많다. 이 증상은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고 온 후부터 생긴 것이다. 언제부턴가 마음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가뭄이 들어 타들어가는 .. 좋은 수필 2019.07.26
야채 트럭 아저씨 / 박완서 야채 트럭 아저씨 박완서 매일 아침 하던, 등산이라기보다는 산길 걷기 정도의 가벼운 산행을 첫눈이 온 후부터는 그만두었다. 산에 온 눈은 오래 간다. 내가 다시 산에 갈 수 있기까지는 두 달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걷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지만 눈길에선 엉금엉금 .. 좋은 수필 2019.07.26
정지선, 긋다 / 문경희 정지선, 긋다 문경희 산사의 일상은 속가에서 얽매이던 시계바늘의 행보와 다소는 무관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한 발 앞서 새벽예불로 아침을 열었듯이 불야성의 예감으로 생의 기운이 더욱 펄펄해지는 저녁나절, 소찬소식의 겸손함으로 일찌감치 마지막 끼니를 해결한다. 산자락을 핥.. 좋은 수필 2019.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