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 맹난자

희라킴 2020. 1. 28. 19:58

  뒤늦게 찾아온 이 빛깔은 맹난자 겨우내 나는 조바심을 치면서 진달래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조화 속인지 이번 봄에는 진달래꽃 빛깔의 재킷도 하나 장만했다. 그런 빛깔에 익숙하지 않아 선뜻 꺼내 입지도 못하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봄을 지냈다. 무슨 현상일까, 뒤늦게 내게 찾아온 이 빛깔은,

 피카소의 청색이 희뿌연한 어둠 속에서 서러운 포말로 발기 되는 이미지라면, 흰색은 서러운 순수, 혹은 자잘한 흰 꽃의 비애로 그리고 노랑은 강렬한 충동으로 이런 빛깔들의 이미지는 설명이 어렵지 않은데, 안타깝게도 진달래꽃 빛깔은 내밀한 어떤 이미지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도, 공원에 들어가서도 눈은 진달래꽃을 찾기에 바빴다. 꽃 모양이 비슷해 달려가 보면 진달래가 아니고 철쭉일 때가 많았다. 거기에는 진달래꽃처럼 마알간 슬픔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양 물감의 핑크와 화이트를 섞은 유화의 그것처럼 둔탁한 마티에르가 느껴졌다. 드디어 공원의 북쪽 구릉에서 진달래꽃을 찾아냈다. 보드레한 그 꽃잎을 한 장 따서 손톱 끝으로 살짝 눌러 보니 손끝에 와서 닿는 물기, 눈물 같아서 미안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알간 분홍꽃 속에 멍든 보랏빛이 아픔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잎맥에 새겨진 실핏줄의 빗금무늬, 그것은 마치 상처의 낙인과도 같다. 꼭 다문 입술 같은 꽃 진달래꽃, 그 속 뜰의 비의를 짐작하게 한다.  예술가들은 표현 이전의 느낌을 곧잘 자신의 이미지로 기호화했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다섯 개의 ‘모음'에다 색채를 부여했다. 언어의 색 이미지라고나 할까, '아'는 검정, '에’는 하양 ,'이'는 빨강, 이런 식이었다. 언어의 색채 이미지, 색채는 분명 언어 이전의 언어인 것 같다. 수묵화의 안개처럼 근원도 없이 피어올라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고 마는 이 기묘한 색채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을 시작하는 순간, 색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마치 다채색 나비가 벗어던진 애벌레의 껍질처럼 화려한 컬러는 사라지고 의미작용의 무채색만 나풀거린다”고 한 어느 미술가의 말이 떠오른다. 입을 떼는 순간, 천리만리 뜻이 달아나고 만다는 선사들의 개구즉착이거나, 뚜껑을 따는 순간 휘발되고 마는 향기처럼 그것들은 안에 가두고 머금고 있을 때에만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옮길 수 없는 향기, 설명할 수 없는 색채, 드러낼 수 없는 경계, 그런 것은 몸으로 써야만 하는 언어 이전의 할이나 방일지도 모른다. 바람에 내맡겨진 풍경처럼 기실 우리의 몸은 외계에 어떻게 반향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다만 그것이 울림을 조용히 수렴하고 안으로 감지할 따름이다.

 잠시 눈을 감고 진달래꽃 빛깔의 출처를 찾아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 본다.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빗물, 그렇지! 그 속에서 무지개 빛깔이 아름답게 방사 되고 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자동차가 흘린 가솔린의 햇빛 반사로 인한 분광의 현상이 아닌가 싶다.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던 고운 빛깔에 정신이 빼앗겨 그 앞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계집애, 일곱 살 때였다. 작은 웅덩이의 물은 미끈거리는 수은 같았고, 그 위에 현란한 무지갯빛이 어른대다가 금세 분홍빛으로 되어버렸다. 마치 누군가의 요술 손에 의한 것처럼,

 그후 무지갯빛의 연분홍색은 전복 껍데기 안에서 비눗방울놀이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비눗방울은 풍선처럼 점점 커지면서 영롱한 무지갯빛을 피워 올리다가 퍽 하고 공중에서 소리고 없이 그만 꺼져버리는 소멸 때문에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게 되던 어린 날이 떠오른다. 허망하게 사라진 빛깔이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비누풍선이 사라진 대신 붉은 보랏빛이 물비누처럼 어른거린다.

 색채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가슴 두근거리던 때의 그 비밀스럽고도 왠지 고통스러웠던 기억, 앞으로 펼쳐지게 될 수많은 날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가를 정작 알지도 못했고 예쁜 빛깔만이 그저 환희였고 늘 그럴 줄만 알았던 시절, 그 기억 저편에 어머니가 서 계신다.

진달래꽃 빛깔은 당시 어머니가 자주 입으시던 한복색이다. 그분은 정물화 속의 여인처럼 늘 조용하셨다. 주말이 되면 나는 친척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타박타박 돈화문 구름다리를 지나 원남동에서 전차를 타고 돈암동에서 내리곤 했다. 한약 냄새가 나는 그 집에 엄마가 계셨다. 왜 그분은 그때 집을 떠나 계셨을까,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실 뿐 애틋한 모녀의 포옹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차려 내온 점심을 먹고 그냥 돌아서 나오는 발길, 무언지 모를 먹먹하던 심정, 손이 닿을 수 없는 틈으로 서늘한 바람 같은 게 지나갔다. 그 바람은 딸과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촌이라 할지라도 개체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간격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때로는 옆모습만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짐작할 때가 있다.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어머니는 친정이라도 있어서 그곳에 보내졌지만, 친정을 북에 둔 단신이신 어머니의 심정을 나는 아직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바람이 넘나들 수 없는 밀폐된 공간, 그 공간에 혼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머니의 심정을 짚어 보는 날이 많아진다. 그러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쿠타가와가 이해되고 사람은 누구나 출구 없는 방을 하나씩 가슴 속에 지니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하시던 어머니의 옆모습이 눈앞에 어른댄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어머니는 그때 왜 그곳에 계셨을까? 어디가 아팠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젊었던 그분은 혹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상하게 마음이 허둥거려진다.

작은 웅덩이 속에 담겨 있던 어린 시절의 먹먹한 그 기억이 이제야 서서히 펴오른다. 갇혀 있던 나만의 한 세계, 마알간 분홍꽃 뒤에 감추어진 뭔지 모를 보랏빛의 아픔으로 번지는 그 빛깔이 찌릿한 전류로 지나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영상 화면에 유혼처럼 거기 서 계신 어머니, 나는 진달래꽃을 보고 있으면 까닭도 없이 오펜 바흐의 <자크린의 눈물>이 듣고 싶어진다. 첼로의 현을 따라 침잠의 세계로 무한히 바닥끝까지 가라앉고 싶다. 그리하여 어둠의 어떤 원형 속에 들어가 숨고 싶다. 다시 태어나도 화가가 되겠다던 최욱경, 별안간 그녀가 생각난다.

 자신이 화가인 것 외에 여자라는 것을 깨닫는 데 29년이란 세월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임신한 중년부인의 배부른 모습이었다고 고백한 그녀의 육성이 왜 자꾸 진달래꽃 빛깔에 들어와 차는지 모르겠다. 여성성의 비애라고 할까, 여성의 본질이라고 할까, 거기에 아이들을 셋이나 앞세운 엄마의 실어증과 아버지의 외도, 진달래꽃 빛깔의 투혼이 아프게 닿는다. 오펜 바흐의 CD는 지금<천상의 두 영혼>을 연주한다. 제발 천상에서는 고통 없는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허공을 선회하며 붉은 점, 점으로 흩어지는 꽃잎,

 그러고 보면 허망하게 스러져가던 비눗방울처럼 인생의 본질은 환인 것도 같고 슬픔인 것도 같다. 말씀이 통 없으시던 어머니는 그때 옷감에 꽃물을 자주 들이셨다. 외로운 사람에게 그 채색놀이는 하나의 위안인 것처럼 보였다. 혼자서 연출 가능한 환상의 세계, 화가들이 격렬하게 추구하던 색이란 것도 결국은 허망한 빛깔 놀이, 요즘 나는 환의 실체를 빛깔에서 만난다. 금년 봄, 알 수 없는 갈망으로 진달래꽃 빛깔에 사로 잡혀 있었다. 아른아른한 맨살의 얇은 진달래 꽃잎 한 장을 기어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것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한 마리 작은 나비 같은 꽃잎에서 나는 차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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