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1079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목포 바다에 갈치가 터졌다는 소식이다. 태풍이 한차례 바닷물을 뒤집어놓아 물고기들의 이동에 낚시꾼들은 이미 들떠 있다. 밤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야 없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끈들을 잠시나마 벗어 던지고,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에 자신을 풀어놓고 하룻밤쯤 있으면 삶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기회는 쉽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낚시 동행 광고를 내었지만 태공들은 한결같이 옆에 있으면 조황에 방해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방법은 따로 있었다. 초보도 가능한 낚싯배가 있다는 것이다. 뱃삯만 지불하면 미끼는 물론 낚싯대도 빌려준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낚싯배 신청을 하고도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생겼고 또 태풍에 미루어졌다가 겨우 나의 시간에 맞추어 출조일을 잡았다. 난생처음 ..

좋은 수필 2020.12.24

몸짓 / 김응숙

몸짓 김응숙 그해 1월, 우리 집 단칸방에 달력 하나가 걸렸다.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벽에 발라진 얇은 벽지에는 희미한 회색 꽃무늬가 엇갈리며 그려져 있었다. 그 벽지에 빈대자국 같은 붉은 녹물을 남기며 박힌 못에 기다란 열두 장의 달력이 걸린 것이다. 보통은 국회의원의 얼굴이 동그랗게 실린 벽보 같은 커다란 한 장짜리 달력이었지만, 어쩌다 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절을 하거나 그네를 타거나 하는 달력이 걸리기도 했다. 운이 좋은 해는 아랫동네 쌀가게에서 주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는 일일달력이 걸리기도 했는데, 그런 해는 노상 그 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가져오던 어머니가 설을 맞아 어쩌다 그 외상값을 다 갚았던 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해 우리 집 ..

좋은 수필 2020.12.12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혜연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이혜연 물새 한 무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몇 번의 날갯짓으로 산만했던 대열을 가지런히 가다듬은 새들은 저무는 강 위를 두어 번 선회하더니, 선홍빛 노을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 간다. 휘모리 가락처럼 사위를 온통 붉은 빛으로 휘몰아 넣던 노을이 스러지고 나자, 한지에 먹물 스미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시각이다. 한낮의 거센 빛살에 숨을 죽이고 있던 사물들이 수런수런 제 기색을 찾는다. 산빛, 물빛이 깊어지고 불빛이 생기를 찾기 시작하는 시각. 낮이라기엔 어둡고 밤이라기엔 아직은 밝은, 빛과 어둠이 함께 하는 이 짧은 순간을 음미하며 나는 하루의 고단함을 벗고 평온함에 잠긴다. 모자란 게 많은 탓일까, 돌아보면 나는 늘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살아..

좋은 수필 2020.11.14

위로 / 이혜연

위로 이혜연 거의 온종일을 음악과 함께한다. 정통클래식을 주로 듣지만,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을 찾아 듣기도 한다. 늘그막 혼자 몸이다 보니 음악이 말 상대를 대신한다.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아들 내외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고, 구차해 보이기도 싫어 외롭다는 말 가슴에 꾹꾹 눌러 두고 산다. 어느 정도는 외로움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창 넓은 카페에 앉아 폼 내며 마셔대던 블랙커피처럼, 달콤하게 즐기던 고독이 요즘 들어 쓴맛을 일깨운다. 가슴이, 눌러 둔 말들로 묵직하다. 그래도 우울증이라든가 공황장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음악 덕분이라고, 음악이 그 지경까지 이르는 걸 막아준 것이라 믿었다. 어느 날 코로나19로 가중된 외로움을 지워보려고 보기 시작했던 모 TV 방송 트로트 경연 ..

좋은 수필 2020.11.04

신 / 김응숙

신 김응숙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든다. 꽤 넓은 현관에 온갖 신발들이 뒤섞여 널려있는 사진이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신천지’를 풍자한 모양이다. 신이 이토록 많으니 ‘신천지‘임에 틀림없다. ’천지‘란 경상도 사투리로 매우 많다는 뜻이다. 얼마 전 코로나 19의 백신이 흰 고무신이라는 유머도 접했는데,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의 기지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종교도 없고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는 나이지만, 덕분에 종교에 관계없이 잠시 웃는다. 기왕 이런 사진도 보았겠다, 나는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달랑 두 식구가 살고 있는 우리 집 현관도 만만치 않다. 며칠 전 가까운 산을 다녀온 등산화 옆에는 농장에서 신었던 검은 고무신이 바닥에 진흙이 말라붙은 채로 벗겨져 있다. 날이..

좋은 수필 2020.09.27

토란잎을 듣다 / 조현미

토란잎을 듣다 조현미 토란잎에 비가 듣습니다. 낮고 음울한 비의 곡조가 누군가의 흐느낌 같습니다. 흘러 어딘가로 스며야 할 눈물이 괴는 곳은 결국, 가슴 아니겠는지요. 토란잎, 저 시푸른 멍은 채 거르지 못한 마음속 독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숨죽여 울던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무성한 토란잎 아래, 늦마*처럼 당신은 울고 있었지요. 크고 널따란 귀를 열어 제 설움에 귀 기울이는 토란처럼요. 흠뻑 젖고 나면 후련하련만, 울어도 젖지 않는 무엇이 있던 걸까요. 등이 따갑도록 당신은 그저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날, 하늘은 참 맑았습니다. 조붓한 비탈길과 만삭의 들판, 도르르 귀를 말고 물의 화음을 타는 물봉숭아와 희푸른 부추꽃…. 내가 열여섯 해를 살다 온 고향의 정경이 모두, 거기 있었습니다. 다..

좋은 수필 2020.09.09

호박수제비 / 장미숙

호박수제비 장미숙 마을회관을 지나자, 어디선가 푸른 종소리가 들려온다. 주위는 온통 참깨 밭, 마을 길옆으로 넓은 참깨 밭이 펼쳐져 있다. 긴 종처럼 생긴 꽃 주위를 벌들이 웅성웅성 맴돈다. 벌이 꽃을 건드릴 때마다 ‘차랑차랑’ 종소리가 난다. 식물의 언어를 터득해야 들을 수 있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참깨 밭을 지나 고샅으로 접어든다. 한낮의 정적을 깨는 송아지 울음소리가 정답다. 바야흐로 나무의 잎이 가장 짙은 계절, 여름은 시골 골목에도 꽉 들어차 있다. 고향 집 감나무 이파리에 햇빛이 폭포처럼 부서져 내린다. 평상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감나무는 고향 집을 상징하는 풍경이다. 평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엄마의 등이 앞뒤로 흔들린다. 콩에 섞인 쭉정이를 고르고 있었는지 소쿠리 두 개가 놓..

좋은 수필 2020.08.08

추임새 / 김순경

추임새 김순경 추임새 같은 맞장구가 큰 힘이 된다. 훈계나 훈시보다는 조용히 들어주고 가끔 고개만 끄덕거려도 좋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은 격려나 치유보다 상처 줄 때가 많다. 힘들 때 단점을 찾아내고 가르치기보다는 서로 추어주는 칭찬이 절실하다. 대학생 때 처음 판소리공연을 보았다. 소리꾼은 무대에 나오자마자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추임새를 아느냐고 물었다. 남도소리를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관객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니리와 창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를 때라 알 턱이 없었다. 설사 안다 해도 직접 공연을 본 적이 없어 섣불리 알은체할 수도 없었다. 머뭇거리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판소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추임새 넣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창을 할 때 흥을 돋우는 소리다. 청중의 분위기나 감흥..

좋은 수필 2020.07.27

돌절구 / 손광성

돌절구 손광성 얼마 전에 장안평에서 오래된 돌절구를 하나 사왔다. 몇 달 전부터 눈여겨 두었던 것이라 싣고 오는 동안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서도 뒷문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예쁜 색시 가마 태워 오는 신랑의 마음이 이러지 싶었다. ​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흠흠!' 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음에 살며시 와서 안기는 것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잘빠진 안성유기 술잔처럼 오붓하고 반만 핀 튤립같이 우아하다. 얼핏 보면 범상한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다. ​ 앞쪽 운두는 살짝 낮추고 뒤쪽은 그만큼 높였다. 앞을 낮춘 것은 앞턱에 절구공이 부딪치는 것을 막을 요량인 것 같고, 뒤를 높인 것은 확 속에 든 곡식이나 가루가 밀려서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듯싶다. 그 때문에 ..

좋은 수필 2020.07.22

마당 / 김만년

마당 김만년 고택마당이 윷놀이 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낙들이 장작만한 윷을 던지며 덩실덩실 마당춤을 춘다. 좌판이 명절 도드리음식들로 푸짐하다. 인절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툇마루에 앉으니 어느새 고향마당에 온 것처럼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생각해보면 마당을 잊고 산지 오래된 것 같다. 어릴 적 마당의 풍경은 계절마다 달랐다. 겨울마당은 빈 마당이다. 농한기로 접어들면서 어른들은 새끼를 꼬거나 화투를 치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마당도 무료한 듯 잔설을 담거나 살창바람을 흘러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볕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닥나무껍질을 삶아서 말렸다. 여우햇살 꼬리 내리는 마당 볕에 앉아서 매운 시집살이 시름을 벗기듯이, 한 올 한 올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삼동 볕에 걸어두곤 하셨다. 마당이 분주..

좋은 수필 2020.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