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 전성옥

희라킴 2021. 10. 18. 19:35

                                                 ‘세 손가락 인사’, 운동화에 담다 

 

                                                                                                              전성옥

 

 

 운동화 다섯 켤레를 미얀마로 보냈다. 포장 박스에 넣기 전, 운동화마다 발을 담아 보았다. 왼발, 오른발… 꾹꾹 눌러 담았다. 씨앗을 심듯이.

 

 밥풀꽃이 한창 피던 즈음, 미스 미얀마의 눈물이 나에게 떨어졌다.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한 ‘한 레이’, 그녀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미얀마 국민의 아픔을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눈물은 침이 달린 뜨거운 쇠구슬이었다. 쿡쿡, 사정없이 내 가슴에 박혔다. 얼마 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한 ‘투자 윈 린’이 ‘Pray for Myanmar’란 피켓을 머리 위로 들었다. 2013년도 미스 미얀마 ‘타 테테’는 총을 들고 무장단체에 합류한다 했다.

 

 젊고 어여쁜 그녀들이 ‘국가대표 미녀’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눈을 감았더라면 보장되었을 탄탄대로의 삶, 꽃방석, 돈방석은 물론이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요즘 말로 특급 베네핏을 단념한 것이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데모꾼이 되고 싶었다. 아니, 나도 데모꾼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즈음의 나는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고작 밥 벌어먹는 것에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온통 다 넘겨주어야 했다. 등가교환에 한참 못 미치던 그 거래, 그때의 밥은 얼마나 비싸던지 나는 늘 허기와 요기의 경계선에 있어야 했다.

 

 두통이 찾아오는 날이 많았고, 회사 눈치를 보며 하루를 빼내어 신경과 약을 타오던 날이었다. 걸치고 있던 여름 재킷에 어깨가 눌린 채 버스정류장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즈음 부산은 도심 곳곳에서 젊음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강의를 집어던진 대학생들이 밖으로 몰려나왔고, 거침없던 그들은 4차선 도로를 점령한 채 정권 타도를 소리쳤다. 초록색 옷을 입은 진압부대가 다가올라치면 서로의 팔을 낀 채로 도로에 누워버리곤 했다.

 

 부러웠다. 나에게는 그 모습이 거대한 놀이마당처럼 느껴졌다. 비감하거나 처절한 무엇보다 단체게임에 임하는 스무 살의 설렘으로 보였다. 나도 스무 살인데, 나도 저들 중 하나가 되어, 저렇게 팔짱을 끼고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에 누웠으면 좋겠다. 저렇게 함성을 지르며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신날까. 처절함과 비감은 아스팔트가 아닌 내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명문대로 진학했던 친구는, 대학학보를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너도 대학에 오라는 아픈 우정이었으나, 한 장 한 장 날아오는 그 학보는 칼날이었다. 때로는 종이에도 손을 베이는 법이니까. 어느 날은 자존심을 8할이나 묻어놓고 마주 앉은 나에게 쑨원의 정신을 설명했고, 민족, 민권, 민생은 말끝마다 달려 있었다. 밥벌이에 삶을 온통 내어준 나는 나라를 사랑할 틈도 없었고, 민족을 구하는 무리에 낄 자격도 없었다. 그날 나는, 벌레였다.

 

 요즈음, 비행기로 여섯 시간쯤 떨어진 나라 미얀마에서 내 스무 살 무렵의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밥벌이에 두 손을 다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왼손 하나는 잠시 딴짓을 하게 두어도 크게 배고프지는 않다. 티스푼 하나만큼이라도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찾게 된 것이 ‘Save Myanmar’란 페이스북 페이지였다. 열심히 들고나며 ‘좋아요’를 누르고, ‘세 손가락’ 인증샷을 찍어 올렸다. 구글 번역을 동원하여 댓글을 달았다.

 

 ‘Save Myanmar’에 안건이 올라왔다. 신지 않는 운동화를 모아 달라 했다. 미얀마 시민군이 정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데 신발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 했다. 발가락 샌들을 주로 신는 더운 나라니 운동화가 흔하지 않을 터, 뛰고 달려야 하는데 전투화는 아니더라도 운동화는 신어야 할 게 아닌가. 신발장을 열었다.

 

 가지런하게 모여 졸고 있는 운동화들, 세상 구경 해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문가 출신이라고 옆구리에 단 문장은 여전히 선명하다. 큰아이는 가정을 꾸려 떠났고, 작은아이는 미국 땅에서 밥을 벌어 먹고산다. 주인 잃은 신발들은 긴 잠에 빠져 있었다.

 

 여느 엄마들처럼 나도 아이들 물건을 쉬이 버리지 못한다. 또 어렵게 밥을 벌어먹은 세월 탓인지 물건이란 것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거나, 내구성의 한계가 와야만 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여, 언제나 필요하면 가져가겠거니 했다. 한동안 지난 뒤에는 저 아까운 신발들 가져가서 신어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물건의 수명을 내구성에 두지 않고 유행에 둔다. 내 말이 귀에 들어갈 턱이 없다.

 

 우리 집 세 모녀는 발이 작다. 운동화 사이즈로 225, 230㎜, 작은아이는 심지어 220㎜ 쪽에 가깝다. 이 작은 신발 중에 무엇이 적합할까. 그래도 발목 올라온 것이 조금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하여 발목 있는 디자인으로 골라 놓았다. 낙점된 운동화들을 보니, 치수는 작고 높이는 깜찍하게 높다. 정말이지 앙증맞기 짝이 없다.

 

 이 앙증맞은 신발들은 누가 신게 될까. 동남아인 평균 체격이 우리보다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성인 남자는 못 신을 것이다. 아마 청소년기 남자아이들이나 여자들이 신게 될 것이다. 청소년과 여자들이 총을 들고 뛰는 상황, 이것은 비극의 시작일까 아니면 희망의 출발일까.

 

 운동화에 마지막으로 발을 넣어 보며 씨앗을 담는다. 미얀마도 민주화가 될 거라는 씨앗을 담는다. 미인대회 이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미얀마 국가대표 미녀들, 그녀들이 많이 기다리지 않고 고국 땅을 밟게 되기 바라며 씨앗을 또 담는다.

 

 출발을 앞둔 운동화 전사에게 경의를 담아 세 손가락 인사를 한다. 그리고 말한다. 가라, 가서 내 발을 담은 듯 뛰어라. 당부하노니 스무 살에 뛰지 못했던 그 길, 그 걸음 그 외침을 낯선 나라에서 낱낱이 소급하라. 빠짐없이 소환하라. 그리고 부탁건대 이 운동화에 발을 담은 사람은 핏자국 남기지 말라. 본인의 피가 떨어지는 일도 누구의 피를 밟는 일도 만들지 말라. 결단코 만들지 말라. 비로소 나는, 몇십 년 만에 늦은 탈피를 한다.

 

 *세 손가락 인사 :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의 저항 표시.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탉론 (나의 수필론) / 김응숙  (0) 2022.06.26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 이혜연  (0) 2022.01.12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0) 2021.09.02
마당가의 집 / 김응숙  (0) 2021.07.18
첫사랑 / 김응숙  (0) 202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