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돌부처 / 김응숙

희라킴 2023. 6. 28. 21:18

 

  돌부처 

                                                                                                                                                           김응숙

 단풍객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숲속 길가 한 편에 돌부처 한 분 앉아 계신다. 언어도단이라 했던가. 저들의 말로는 도저히 뜻을 전할 길이 없어 이렇듯 비켜앉았나 보다. 석굴암을 향해 가는 길 어디쯤이다. 사람들은 천 년이 넘어도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석굴암 본존불을 뵈러 가기에 여념이 없다. 언뜻 보아도 몇몇 시비와 함께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부처 또한 대중에게 관심이 없는지 마냥 똑같은 표정이다. 반쯤 내리뜬 눈과 엷은 미소는 전적으로 해석의 영역이다. 천년고도 신라의 상징인 처용의 미소를 걷어내고 보면 그 영역은 더 넓어진다. 명상에 잠긴 눈 같기도 하고, 졸음에 겨운 눈 같기도 하다. 자비로운 미소로 보이다가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입매로 보이기도 한다.

 둥근 얼굴과 육덕진 몸매가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아니 그대로 빼다 박았다. 영화의 예고편처럼 모형을 하나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그렇다고 부처에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나는 돌부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힌다.

 비를 가리는 누각도 없고 향이나 촛대를 놓을 제단도 없다. 덩그러니 난전에 나앉아 있는 부처에게 다가가 손을 뻗다가 흠칫 놀란다. 부처의 무릎께가 따스하다. 돌이니 당연히 차가울 거라 짐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은 따끈한 가을볕이 부처의 어깨며 가슴팍을 내리쬐고 있다. 태양의 열기가 돌에 스몄다. 손바닥으로 묵직한 온기가 전해진다. 얇은 가사 아래에서 마치 피돌기라도 하는 듯하다.

 피돌기를 하는 것들에게는 온기가 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품에 꼭 안고 있으면 마치 오븐에서 구워지는 빵 같은 몰랑한 촉감과 함께 내 체온보다 한 눈금 더 높은 온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은 스스로 발열하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그 에너지로 한시도 쉬지 않고 자랐다. 그러고 보면 온기는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이고자 하는 염원인 것 같다.

 지구의 마지막 날을 다룬 공상과학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핵폭발이 일어나고 핵 구름이 태양을 가리자 지구는 급격히 얼어붙는다. 살아남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막아보려 책을 불태운다. 지폐는 이미 태웠다. 셰익스피어와 프로이트와 릴케의 언어들이 한 줌 재가 된다. 성경도 불꽃 속으로 던져진다. 단지 얼마간의 온기를 얻기 위해서.

 혹, 이 돌부처도 생명을 얻고자 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도대체 얼마를 이 자리에서 좌정하고 있었던가. 등 뒤에서는 푸른 동해가 쉼 없이 철썩이고, 토함산은 계절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었다. 뜨거운 태양이 등을 데우며 서서히 떠오르는 날마다 돌 속의 척추는 조금씩 삐거덕거리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무릎이 따뜻해지면 굳은 관절을 펴고 단 한 걸음만이라도 내딛고 싶었을 게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속에서 이 돌부처를 파내며 석공은 어떤 염원을 했을까. 뭇 대중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구원하는 신성한 부처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해하려면 알아야 하고, 알려면 감각 해야 한다. 오직 생명만이 감각 할 수 있다. 그러니 석공이 내심 원했던 것은 이 돌부처의 피돌기가 아니었을까.

 아득한 옛날, 지구의 맨틀이 식기 시작할 때부터 화강암은 철, 칼슘, 마그네슘 같은 무거운 광물들을 가라앉히며 서서히 굳은 돌이다. 물론 이 ‘서서히’라는 표현에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담겨있다. 지구의 역사가 45억 년이라고 하니 어림잡아도 인간의 역사는 화강암의 그것과는 견줄 수조차 없다.

 화강암은 버릴 줄 아는 돌이다. 버리는 데도 인내가 필요하다. 억겁의 세월을 버리고 또 버리며 가벼워지기를, 순수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석공의 손에 의해 부처로 나투어졌으나 생명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저 낮이면 데워졌다가 밤이면 차가운 돌로 돌아갈 뿐이다. 천형이다.

 불현듯 저 부처를 온몸으로 안고 싶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온기를 전하고 싶다.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훈기를 불어넣고 싶다. 눈동자를 한 꺼풀 깎아내고, 귓구멍을 뚫는다면 보고 들을까. 저 거친 손바닥을 비비고 비비면 촉감을 느낄까.

 언어도단이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언어 이전에 감각이 있다. 존재라는 원전을 읽어낼 수 있는 언어 아닌 언어가 감각이 아닐까. 감각은 불완전한 인간에게 내린 신의 언어이다. 어쩌면 신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불국사에서 종소리가 밀려오고, 어두워지는 풍경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이제 말과 글이 끊어진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터벅터벅 돌아서 내려오는데, 다시 차갑게 식어야 할 돌부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말없이 앉아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화風化 / 최운숙  (0) 2023.08.06
껍데기 / 박동조  (0) 2023.08.06
우엉을 먹으며 / 정성화  (0) 2022.06.26
암탉론 (나의 수필론) / 김응숙  (0) 2022.06.26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 이혜연  (0) 20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