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193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 김미경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김미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

문예당선 수필 2021.01.05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 우마루내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우마루내 시어머니가 화장대 앞에서 당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칠십 년의 세월이 말해주듯이 하염없이 거친 얼굴이다. 한여름의 밭에서 기미가 올라왔고, 스킨과 로션 없는 생활을 해오면서 요철이 심해졌다. 형광등에 반사될 때마다 초배지(初褙紙) 같은 피부가 아른거린다. ​ 초배지는 초배할 때 사용되는 종이다. 초배가 정식으로 도배하는 정배 전의 애벌도배라면 초배지는 애벌벽지다. 초배지의 특성상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작업하기 때문에 벽지보다 허름한 신문지나 부직포가 사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허름한 종이여도 초배하지 않은 벽은 매끄럽지 않고 벽지가 쉽게 떨어진다. 외유내강이라는 한자성어처럼 외부가 말끔하기 위해서 초배지가 내부에서 단단하게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

문예당선 수필 2021.01.03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 이다온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이다온 진열대 위로 둥실 달이 떠오른다. 은은한 불빛이 바닥에 고인다. 조명을 받은 항아리는 방금 목욕하고 나온 아낙네 같다. 천의무봉의 살결이 백옥처럼 희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데도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자세히 보면 달항아리는 좌우균형이 맞지 않는 비대칭이다. 보름달이 약간의 기울기를 가진 것처럼. ​ 가슴이 사라졌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왼쪽 가슴을 확인했다. 불룩하게 솟아있던 자리가 분화구처럼 푹 꺼져 있다. 움푹 팬 곳에 낯선 어둠이 만져졌다. 두꺼운 밴드가 선홍색 칼자국을 애써 가렸다. 와락, 울음이 밀려왔다. 재빨리 환자복을 내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덮었다. ​ 이태 전이었다. 부산스럽게 외출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왼쪽 가슴에서 ..

문예당선 수필 2021.01.01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 조현숙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조현숙 무람없는 발걸음이 햇발 가득한 절 마당의 고요를 깨뜨린다. 넌출진 능소화가 고목의 우듬지를 타고 오르며 날 굽어보는데도 기어이 불이문을 넘고 만다. 몇 시간 째 경내 구석구석, 도린 곁까지 맴돌았지만 ‘구리항아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걸까? 스님들의 수행 공간까지 헤집고 다니자 한 여인이 종무소 문을 열고 내다본다. 말 없는 꾸지람이리라. 그래도 염치없는 객은 모른 척, 항아리의 행방부터 묻고 본다. “동호라니, 그게 뭡니까?” 여인의 되물음에 그만 힘이 쑥 빠져버린다. 대웅보전을 청소하던 스님도, 작압전 앞을 지나던 스님도 동호의 행방을 물었을 때 꼭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보물 208호 구리항아리’라고, 벌써 몇 바퀴째 경내를 돌고..

문예당선 수필 2020.12.01

[제20회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

[제20회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석류, 다시 붉다 김영인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문예당선 수필 2020.10.12

[제15회 생활문예대상 은상 월간 『좋은생각』마른 꽃 / 박현

마른 꽃 박현 화초에 물을 주다가 스타티세 앞에 멈춘다. 물이 필요 없는 마른 꽃이다. 생화일 때나 말랐을 때나 변함없어 꽃말처럼 영원히 사랑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꽃은 친구가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아픈 사람이 무슨 정신으로 꽃을 골라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스박스에 나란히 놓인 여러 종류의 꽃은 화병 하나로는 부족할 만큼 많았다. 친구의 빈소에 다녀온 날 신발장 앞에 있던 스타티세가 눈에 들어왔다. 줄기는 물기 하나 없이 말랐지만 작은 꽃송이는 형형하게 빛났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 걷지도 못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교회 유아실에 누워서 입만 벙긋거리며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 겹쳐졌다. 몸은 뼈만 남았어도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화병에 꽂은 꽃들은 시들었지만 스타티세는 생화 같아..

문예당선 수필 2020.08.11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 노정옥

[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길어깨 노정옥 국도를 택한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열여덟 량 장대열차처럼 도로는 정체만발이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까울 때가 있을까. 차라리 잠시 쉴 곳을 찾는데 우측으로 트인 길 하나가 눈에 띈다. 순화된 어휘라고 느낌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길어깨란 갓길로 사용되기 전의 낱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더 좋아한다. 어깨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배어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당해 보이려면 어깨를 펴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깨를 내어주는 건 내 힘을 빌려주는 일이고, 어깨에 기대는 것은 상대에게서 안식을 얻는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니 길어깨란 무척 편안하고 정감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도 이런 어깨를 만나면 세상은 따뜻한 고향이..

문예당선 수필 2020.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