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 조현숙

희라킴 2020. 12. 1. 20:05

[2020년 동서문학상 금상]

 

                                                             항아리의 힘

 

                                                                                                                              조현숙

 

 무람없는 발걸음이 햇발 가득한 절 마당의 고요를 깨뜨린다. 넌출진 능소화가 고목의 우듬지를 타고 오르며 날 굽어보는데도 기어이 불이문을 넘고 만다. 몇 시간 째 경내 구석구석, 도린 곁까지 맴돌았지만 ‘구리항아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걸까? 스님들의 수행 공간까지 헤집고 다니자 한 여인이 종무소 문을 열고 내다본다. 말 없는 꾸지람이리라. 그래도 염치없는 객은 모른 척, 항아리의 행방부터 묻고 본다.

 “동호라니, 그게 뭡니까?”

여인의 되물음에 그만 힘이 쑥 빠져버린다. 대웅보전을 청소하던 스님도, 작압전 앞을 지나던 스님도 동호의 행방을 물었을 때 꼭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보물 208호 구리항아리’라고, 벌써 몇 바퀴째 경내를 돌고 있지만 보지 못했다고 지지지지 거린다. 역시나 본적도 없고 운문사에 그런 보물이 있다는 것도 금시 초문이란다.

“운문사에 있는 거 맞아요. 아님 제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운문사 동호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걸 다들 모른다고만 하시면 전 어떡해요? 정말 보고 싶은데, 태풍 때문에 못 올까봐 걱정은 얼마나 했는데요.”

횡설수설, 스스로도 한심하다. 그게 딱했던지 안에서 한 스님이 나오더니, 보물은 있지만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동호의 존재를 아는 스님을 만나서 반갑다는 게 또 생떼를 쓴다. 뭣보다 스님의 순한 눈주름에 힘입었다고나 할까. 왜 공개를 안 하냐, 약아계 근처에서 동호를 파낸 게 맞느냐. 한 번만 볼 수 없겠느냐. 부전스럽게 묻는다. 나와 달리 스님은 야젓한 목소리로 답한다.

 “제가 알기론 이목소 근처에서 건졌습니다만.”

 “이목소라니, 못인가요? 그럼 거긴 어디죠? 항아리를 보여줄 수 없으면 그걸 건진 못이라도 보여주세요.”

 “그 못은 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깊어져 실 한 타래를 던져도 끝없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금지구역이고 이미 금지구역에 서 계십니다.”

 “그렇게 깊은데 어떻게 들어가서 항아리를 건진 거죠? 그저 전설인가요?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보여주세요.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네?”

새퉁스럽게 조르는 아낙네가 어지간했던지 스님이 설핏 싱그레 하더니 금세 또 정색을 하면서 처진 눈에 힘을 준다.

 “사실입니다. 그 보물이 여기 있으니까요. 저는 이곳에 26년 동안 있으면서 두 번밖에 보지 못한 보물을 어째서 오늘 처음 온 분이 자꾸 보겠다고 보채십니까?”

그러더니 손을 들어 우거진 노송 사이로 보이는 나지막한 돌담 쪽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못으로 내려가는 건 안 됩니다.”

돌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이목소는 아담한 크기지만 갈 수 없어서 깊다. 풍덩풍덩 뛰어드는 빛살이 물살을 흔들어 댈 때마다 수면은 윤슬로 찰랑인다. 어느 순간 내가 못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못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소나무 가장이에서 놀던 바람까지 가세해 물밑에서 뒤척이는 돌멩이들의 깊은 잠을 깨웠을까? 그들이 품고 있던 옛 이야기, 구리항아리를 왈강왈강 들려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과 ‘공방전’을 쓴 임춘은 고려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고려 건국 공신의 자손으로 귀족사회에서 문명을 날렸지만 스무 살에 무신 란을 겪으며 모든 기득권을 빼앗기고 30대 후반 죽을 때까지 절대빈곤 속에서 비통한 삶을 살았다. 그가 죽은 후, 지기였던 이인로가 그의 시문을 모아 ‘서하집’을 엮었는데 고려시대 대부분의 문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의 무정함과 전쟁의 참상으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운문사의 ‘담인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서하집을 구리항아리에 넣고 이 항아리를 다시 구리 탑에 넣어 약야계에 묻었다. 세월이 흘러 조선 후기에 운문사에 있던 ‘인담스님’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그의 도움으로 동탑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 서하집을 담은 항아리가 있었다고 한다. 임춘의 글은 그렇게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는 이 항아리가 왜 그리 보고 싶은 걸까? 처음엔 단순했다. 수업시간에 가전체 소설을 가르치다보니 작가와 관련된 자료를 찾게 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게 된 게 서하집이이며 구리항아리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하집을 담았던 구리항아리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누군들 까슬까슬하고 환한 생을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눅눅한 삶의 비애를 안아야 했던 한 인간이 어떻게 글을 붙잡고 안추르며 견뎌냈는지. 그 시간들을 품었던 항아리가 참으로 궁금했다. 삶은 ‘다시’가 없는 혹독함이다. 실의와 고뇌에 찬 질곡의 시간을 글 꽃으로 피워낸 한 사람. 그리고 그를 안전하게 담았다가 기어이 세상에 내어 준 항아리.

 

 엄마의 항아리도 우리에게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이 알 수 없는 미련의 발단은 아마도 엄마의 항아리일 것이다. 실 한 타래가 들어 갈 만큼 깊은 못에 잠겨서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한 생을 살려 놓은 구리 항아리처럼, 엄마도 끝 모를 슬픔과 두려움의 심연에서 어떻게든 자식들을 길어 올려 밝은 세상에 다잡아 두어야 했던 것이다.

 

 연꽃문양항아리는 한동안 우리 집의 보물이었다. 엄마가 철없는 자식들을 이고 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시드럭부드럭 마른 풀처럼 근천스러운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지던 숱한 전쟁을 피해서 떠났지만, 우리의 피난처가 너무 지지부레해서 차라리 그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 많았다.

 

 어느 날 외갓집에 다녀 온 엄마가 우리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이 보물이 얼마나 값나가는 건지 아니? 이 도자기는 외갓집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야. 이것만 팔면 아무 문제없어. 그러니까 너 희들은 딴 생각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보물이 팔려나간 자리에 돈이 그득하리라 믿었다. 항아리가 그대로 있으면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언젠가 발휘 할 그의 힘을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고 미술품을 감정해 주는 방송국 프로그램에도 나갈 거라고도 말했다. 좁은 방에 다 같이 누워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감정가를 앞 다퉈 말하며 얼마나 신났었는지. 우리가 던지는 감정가마다 맞장구치면서,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던 엄마의 큰 소리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지. 밤마다 항아리의 값어치를 매기느라 뒹굴며 나누던 시간들은 얼마나 따사로웠는지. 그렇게 우리는 항아리가 팔려 나가기를 기다리며 키가 컸고 마음이 컸다.

 

 꿈이란 무채색의 삶에 해사한 꽃 하나 던지는 일일까? 활짝 벌어진 아가리와 단단하게 부풀려진 몸체에는 연꽃송이가 가득하다. 엄마가 이조자기라고 우겼던 채색항아리는 아직 팔리지 않은 채 딸들의 편지, 어버이날 카네이션, 손자들의 용돈 봉투를 담고 오래된 집에서 여전하다. 엄마가 항아리에 담은 것은 밥이고 꿈이고 위로였다. 흥부의 박이었다. 언제고 슬근슬근 박을 타는 순간 우리 앞에 쏟아질 찬란한 복을 품으며 사는 일은 언 발을 녹이는 한 줌 햇살처럼 감질나지만 예쁜 소망이었다. 엄마의 항아리는 철없던 우리를 만나지 않게 해줬고 철든 우리를 하하 웃게 만든다.

 

 구리항아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힘으로 살아남은 글을 읽으리라. 그러면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항아리 마음보 하나쯤은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목소 잔물결이 돌아서는 내 옷깃을 자꾸 잡아끌어 오늘을 억겁의 세월에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