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좋은 수필』 베스트에세이 10 수상작] 의자 / 장미숙

희라킴 2020. 1. 14. 19:36

 [『좋은 수필』 베스트에세이 10 수상작] 의자 장미숙 매장 앞 도로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노인의 등이 낯설지 않다. 근처 마트 앞에서 자주 마주치는 노인이다. 낡은 파란색 조끼와 구부정한 등에 쌓인 세월의 그림자가 짙다. 노인은 인도와 차도 경계에 앉아 있다. 오늘은 햇볕이 달라붙은 시멘트 바닥이 그의 휴식천가 보다. 폐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옆에 두고 노인은 미동이 없다. 노인의 존재에 아랑곳없이 차들은 매연을 뿜으며 지나간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길가는 사람들도 무심하다. 노인 또한, 매연이나 소음에 반응하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해 보이지만, 폐지를 줍는 그에겐 정해진 자리도, 정해진 시간도 있을 턱이 없다. 앉는 곳이 그의 삶이고, 다리를 뻗는 곳이 그의 쉼터다.

도로 건너편에도 두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다. 그곳은 건설자재 회사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회사 인부들이다. 두세 명이 매일 그렇게 앉아 담배를 물고 있거나,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 있다. 쉴 곳이 따로 없는 그들에게는 작업장이 쉼터로 보인다. 간이의자 하나 없이 천막과 트럭이 있는 그곳에서 인부들은 피로를 푼다. 그런데 왜 그들은 꼭 쪼그려 앉아야만 하는 걸까. 늘 같은 자세를 고수하는 걸 보면 환경은 불편함마저 무디게 만드는가 보다.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지만, 그들이 출입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여름에도 그들은 천막 밑에 옹색하게 앉아 있다. 시원한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과의 괴리만큼이나 그들에게 의자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일까.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면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거리에 나는 서 있다. 내가 가끔 그들을 바라보듯, 간간이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쪽을 향해 빤한 시선을 두고 있을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빵집 직원과 건설자재 회사 인부가 가진 공통점이라면 누군가에게 고용(雇傭)된 사람이고,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공통점이 있다. 서 있는 자도, 쪼그려 앉은 자도 의자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부들도,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도, 프랜차이즈 가맹점에서 일하는 나도 모두 의자가 없다.

 사회라는 큰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의자를 갖지 못한다는 건, 열악한 환경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의자가 없다는 건 부리는 자가 아닌 부림을 받는 자일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의자는 노동의 강도를 개별화시키고, 심리적 열등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의자가 가진 힘을 몰랐을 때, 의자란 언제든지 앉고 싶을 때 앉을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자는 그런 게 아니었다.

 맨 처음 의자는 내게 열등감으로 다가왔다. 스물 몇 살 때, 간절히 의자가 갖고 싶은 적이 있었다. 가난과 가정환경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열일곱 살에 공장에 들어갔다. 의류 포장지를 제조하는 공장은 대기업 하청이었다. 공장 환경은 열악했다. 온종일 돌아가는 기계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손은 기름때로 새카매졌다. 벤젠(benzene)을 다루다 보니 손끝이 갈라지기도 했다. 가장 힘든 건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일이었다.

 순수와 두려움만이 나를 지배했을 때, 도시는 내게 거대한 세상이었다. 촌아이에게 일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사회 구조의 속성을 알아가면서 욕망과 노력이 때로 힘을 발휘한다는 걸 깨우치게 되었다. 큰 작업장 안에는 작은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현장 사무를 보는 곳이었고 내게는 별천지 같았다.

나는 사무실 직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폭신한 의자에 앉아 벤젠 대신 펜을 들었다. 작업장의 소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먼지를 마시지 않아도, 손이 거칠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추위와 더위로부터 온전히 보호받았다. 그녀는 현장 직원들 위에 군림했고, 커피라는 귀한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동경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기계에서 나오는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비닐을 간추리며 사무실을 힐끔거렸다. 몇 년이 지난 뒤, 기회가 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사무실 여직원이 그만둘 것이며 현장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말이 나왔다. 틈틈이 책을 읽고 작업 집계를 하던 내가 적임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폭신한 사무실 의자에 앉은 나를 상상하며 더 열심히 회사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나는 배제(排除)되었다. 다른 사람이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녀는 현장 여직원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침이 마르도록 날 칭찬하던 관리자들도, 글씨를 잘 쓴다고 추켜세우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다. 중졸 학력은 의자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가르쳐주었다. 그 후, 나는 스스로를 하향(下向)시켰다. 구인광고를 볼 때도 의자는 애써 피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지레 겁먹었다. 차단당하기 싫어 미리 포기해 버리는 거로 얇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결혼 후, 오 년 정도 의자에 앉아 본 적은 있다. 마을문고에 도서대여 봉사활동을 지원했을 때, 아무도 내게 학력을 묻지 않았다. 지원자들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봉사 내내 고졸 행세를 했다. 돈을 받고 일하는 게 아니어서 양심의 가책은 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의자의 무게에 짓눌렸고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먼 길을 돌아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지만 학교에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의자에 대한 설움을 털어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나는 의자에서 밀려났다. 학생의 신분이 아닌 직업인이 되었을 때, 나이는 걸림돌이었다. 중년의 아줌마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흔치 않았다. 내가 빵집에서 일하게 된 이유였다.

 온종일 서서 두 다리로 삶을 지탱한 지, 칠 년이 되어간다. 해가 바뀔 때마다 몸이 조금씩 기우는 걸 느낀다. 한 평 남짓한 나의 작업공간에 의자는 없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데다, 앉을 시간도 없어서다. 내 의자가 없을 뿐, 매장에는 의자가 많다. 손님들이 편히 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도록 은은한 조명 아래서 의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의자가 비어 있어도 내가 앉을 수 없는 곳, 직원인 나는 의자의 주인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열 발자국 거리에 있는 의자가 심리적으로는 한없이 멀다. 건설자재 회사 인부들이 굳이 쪼그려 앉는 것도 심리적인 거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끔 본분을 잊고 의자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다. 몸이 아프거나 밥벌이가 유난히 힘든 날이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있을 내 의자를 생각한다. 주인을 만나지 못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을 의자, 학력도 나이도 다 떨치고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그 의자를 생각하며 무너진 다리를 곧추세운다.

 창밖을 보니 노인이 없다. 건너편 인부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자리에 나무 그림자만이 꾸벅꾸벅, 피곤한 오후를 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