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불혹의 추석/ 천상병 불혹의 추석/ 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 좋은 시 2018.10.02
햇살에게 / 정호승 햇살에게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 2018.09.01
문 / 마경덕 문 마경덕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좋은 시 2018.03.29
목련 / 고정숙 목련 고정숙 꼬깃꼬깃 접힌 하얀 편지 한 송이, 손 안에 피어났다 꽃술처럼 들쑥날쑥 써진 글자들 젖내음 나는 여백, 누르면 뚝 뚝 떨어질 것 같은 젖 방울인데 양파깡 과자 한 봉지 선물과 함께, ‘엄마, 생일 축하해’ 하며 달아나는, 눈이 부셨다 가지의 등뼈를 자근자근 밟으며 자라는 .. 좋은 시 2018.03.13
일 잘하는 사내 / 박경리 일 잘하는 사내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 좋은 시 2018.03.09
[디카시] 지리산 시집 / 이철웅 지리산 시집 지리산이 쓴 제 시를 시집으로 묶어 팔고 있는 책방을 알고 있다. 시를 읽지 않는 것은 사시사철 꽃피는 동리나 꽃지는 현대나 마찬가지다. 마수걸이조차 못한 채 산그림자 내려와 오래 침묵하다 돌아간다. [이철웅 시인의 디카시 - 제2회 하동 디카시 공모전 최우수 작] 좋은 시 2018.03.08
[디카시] 몸빼바지 무늬 / 공광규 몸빼바지 무늬 몸매를 잊은 지 오래된 어머니가 일 바지를 입고 밭고랑 논두렁으로 일흔 해 넘게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벗어놓은 일 바지에 꽃들이 와서 꽃무늬 물감을 들여 주었습니다. [공광규 시인의 디카시 - 제 1회 디카시 작품상] 좋은 시 2018.03.04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 정호승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정호승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 좋은 시 2018.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