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은화 / 반숙자

희라킴 2019. 7. 26. 18:37

은화 반숙자 멀리서 종소리가 울린다. 뎅뎅 뎅 데엥…….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해서 일손을 놓을 때가 많다. 이 증상은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고 온 후부터 생긴 것이다.

언제부턴가 마음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가뭄이 들어 타들어가는 논 모양  마음의 논이 균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혼을 적시는 음악에 깊이 빠져보고 싶고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묵상의 심연으로 침잠하고도 싶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도 회의가 들었다.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는다는 황혼의 언덕에서 이 무슨 해괴한 충동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기도를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도 마음은 메마름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 신문에서 영화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1084년 설립 이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사들이 900년 동안 이어오며 살아가는 일상을 찍은 영상이라 했다. 감독은 1984년 침묵으로의 여행을 기획하고 수도원에 촬영의사를 전달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때가 되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을 들은 지 19년을 기다려서야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허락을 받고도 촬영조건이 까다로웠다. 일테면 혼자서 찍고 작업할 것, 수도원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인위적인 어떤 조명이나 음악도 쓰지 않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긴 여운 끝으로 눈 덮인 알프스 계곡 십자가 종탑이 다가온다. 종소리를 따라 화면이 열리면 문틈으로 흘러드는 빛이 절제된 구도의 실내를 비추면서 기도하는 수도사 옆얼굴을 드러낸다. 이 모습은 영화 내내 간주곡처럼 수시로 나왔다. 눈 덮인 수도원의 고즈넉한 고요가 평화롭게 수도원을 감싼다.

 화면에는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제가 이곳에 있나이다.”하는 자막이 지나간다. 소단원이 끝나고 새로운 단원이 시작될 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두 문장이 번갈아 가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수도사들은 삶이 기도다. 먹는 일도 종치는 일도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도 모두 기도다. 식사도 대축일에만 큰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매일은 각자 독방에서 한다. 식사당번 수사가 바퀴달린 손수레에 식사를 싣고 와서 칸칸마다 손바닥만 한 문을 갈고리로 열고 식사를 넣는다. 이건 영락없는 죄수다. 최소한 식단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 땅바닥에 끌리는 무거운 수도복과 두건을 쓰고 이층 삼층으로 오르내리며 세탁하고 장작 쪼개고 종치고 기도하고 머리를 깎는 일상, 그들에게는 침묵이 생활이다. 수시로 혼자 기도하고 모여서 성무일도를 바치고 그레고리안 성가로 찬미 드리는 삶이다.

 거반 세 시간 가까이 영화에 빠져서 나는 수도사들에게 묻고 또 묻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감방 같은 그곳에 사느냐고. 저 넓은 세상이 보이지 않느냐고, 본능을 포기하고 자아를 내던지고 가족과 세상으로부터의 유대를 끊어버리고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그 물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화면을 향하여 이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그 물음들이 나를 향해 꽂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분들을 또 알고 있다. 알프스가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에서 세상과 격리되어 스스로 유폐하고 사는 분들이다. 바로 가르멜회 수도사들이다. 이분들은 엄률의 수도회로써 수녀들은 살아서 들어가면 죽어서나 그 문을 나올 수 있는 봉쇄수녀원이다. 담이 높다. 수도원 특징이라면 일반인들이 들어가는 곳에서 수녀들이 사는 곳에 가려면 이중 삼중 문을 통과하고도 철망을 앞에 두고 만나야 한다. 비록 자기 부모를 만난다 해도 엄한 경계를 지켜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그분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느꼈다. 그분들은 철저히 잊혀지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잊혀지면 잊혀질수록 단 한 분 님에게만 보이는 꽃이 될 수 있기에 스스로 자청해서 철망 안에 갇히는 것이다.

 세상 잣대로는 해답이 없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아는 것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일진데 어찌하여 그분들은 숨고 아주 숨어 무無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더구나 내면적으로 완전히 자기를 버리는 삶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재속회원으로 수도원 울타리를 맴돌면서 십 년 세월을 축낸 나는 그것이 늘 궁금하고 한편 답답했다. 음식을 절제하고 오관을 절제하고 최소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한도로 살아가는 식물 같은 사람들.

 그런 나에게 “위대한 침묵”의 수도사들이 답을 준다.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제가 이곳에 있나이다.” 그곳이 알프스 수도원이건 서울 복판이건 시장통이건 지금 내가 있는 여기는 바로 님이 나를 선택하여 부르신 곳이라는 확고한 결론을 얻는다. 내가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보내셨기에 여기 있으니 여기 사는 것도 당신이 책임지고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사랑.

 그분들은 은화였다. 알프스 골짜기에 숨어 피는 꽃들, 세계 곳곳 한국 땅 곳곳에 숨어서 피는 꽃들, 그래서 영성 깊은 수도자들은 이분들을 일러 가톨릭 심장이라 하는 것일게다.

 그 꽃들은 사람을 위해 피는 꽃이 아니다. 깊이깊이 숨어서 단 한 분, 님의 눈길이 닿기만을 바라서 기도의 옷으로 영혼을 단장하고 침묵으로 피는 꽃이다. 눈물겨운 수도의 정점에 맞이하는 님과 합일을 체험하는 순간 죽어도 좋을 천국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지금도 종소리 여전하고 청빈의 삶 여전하고 그렇게 숨어 숨어 은화는 피고 질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출처] 은화 / 반숙자|작성자 erigero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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