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아버님의 마지막 ‘스버’ / 이난호

희라킴 2019. 8. 23. 17:29



아버님의 마지막 ‘스버’ 


                                                                                                                                     이난호


시아버님의 사투리엔 생판 처음 듣는 게 몇 있었다. 그마저도 어조가 높낮이 없이 나직하시어 혼잣말씀인가 흘리기 일쑤였다. 당신 의중을 드러내실 때도 거두절미 낱말 몇 개로 압축하시고는 두 번 채근하시는 법 없고 말씀의 향방도 늘 모호했지만 ‘시그니’ 하셨다 싶으면 다음 진지 상에 시금치 찬이 올려졌다. 된소리 발음을 피하시는 듯 싶었고 펌프, 버스, 커피 등 외래어는 물론 소위 시쳇말, 선거, 전화, 학자금, 심지어 새로 나온 담배 이름도 한동안은 어름어름 흐리셨다.

 시아버님과 아직 서먹할 때 처음으로 그분의 ‘스버’를 듣고 짜르르 했다. 친구 분과 대작 중, 얼마 전에 타계한 또 다른 친구를 ‘보구 스버’ 하시고는 쑥스러운 듯 웃음으로 덮으시는 아버님을 나는 바로 볼 수 없었다. 또 한 번 그분을 ‘보구 스버’하셨을 땐 “당장 가먼 볼 거 아녀?” 어머님이 면박 주셨고 “내가 하눈님여? 거길 맘대루 가게?” 아버님의 어미語尾가 모처럼 딱 부러지셨다. 번뜩, 두 분 말씀 너머로 어떤 것, 내 어린 나이나 미숙한 됨됨이로는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스친 듯 했다. 아, 했을 뿐 아버님을 바로보지 못했다.

아버님이 돗자리를 치시거나 솔뿌리로 바가지를 꼬맬 때 나는 통마늘을 들고 가 까는 척 ‘스버’ 목록을 늘리려했다.

  “아버님, 전에 사셨던 섬마을 이름이 뭐였어요?”

  “‘버꾸미’두 있구, 머.”

  “친구 분들 성함 생각나세요?”

  “다덜 친했으니까, 머.”

  “그분들 보고 싶으시지요?”

  “바뻐서, 머.”

 대화는 뚝뚝 끊어졌다. 나는 슬퍼지려고 했다. 억울함이기도 했다. ‘스버’ 목록을 늘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버님은 순전히 시조부님의 뜻에 따라 대처로 떠난 위아래 형제 다섯을 위해 섬에 처져 일했다. 시조부님의 뜻으로 섬을 떠나와 턱없이 늘어난 노동량에도 묵묵히 일했다. 저녁이면 갈라진 손톱 밑에 쇠기름을 녹여 처매면서도 내내 묵묵하시더라고 어머님이 회상하실 때 나는 억울했다. 바빠서, 친구를 추억할 틈도 없이 바빠서 속절없이 당신 가슴 밑으로 가라앉았을 아버님의 숱한 ‘스버’들이 억울했다. ‘스버’는 희원希願을 뜻하는 ‘싶어’의 사투리였지만 아버님의 ‘스버’에 담기는 희원을 반의반이나 ‘싶어’가 감당할까.    

 가까스로 추린 아버님의 ‘스버’는 고작 다섯, 주구 스버, 허구 스버, 먹구 스버, 가구 스버, 보구 스버 뿐이었다. 그나마 아버님은 ‘스버’처럼 속내가 대뜸 드러나는 말은 가슴에 묻어둬야 한다는 듯 말말 계제에도 잘 끼우지 않으셨다. 남에게 뭘 주고 싶다는 말 ‘주구 스버’ 대신 아버님은 먼저 손을 주시는 분이었다. 먹고 싶단 말씀 ‘먹구 스버’도 아버님이 하시면 츱츱하게 들리지 않았다. ‘하고 싶다’는 말씀 ‘허구 스버’엔 욕끼가 번득이지 않았다. 설혹 가고 싶은 곳에 ‘가구 스버’도 마냥 기다리셨다. 아버님이 ‘보구 스버’한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섬 친구의 부음을 받았을 때 아버님은 결연하셨다. 갈음옷을 타박하신 것도 그때뿐이었다. 갈음옷 차림의 아버님은 고소설 속 선비셨다. “주막깨나 드나들더니…” 어머님도 흔연히 아버님의 젊어 한때를 추억하셨다. 상가에서 돌아오시는 아버님은 아직 선비셨다. 얼마쯤 비틀걸음에 느슨한 두루마기 고름, “그 자가 가데!?” 갓 떠난 친구를 뇌는 어조에 가락이 들어갔다. 나는 기대감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단군어른으로부터 공자님, 큰형님, 대통령을 줄줄이 불러내고 오래전에 타계한 단짝 친구와 며칠 전에 타계한 친구를 나란히 불렀다. 호명하는 틈틈이 ‘사람 도리’를 끼우셨다. 두어 번 거푸 ‘사람 도리’만 뇌셨을 때 나는 바야흐로 아버님의 ‘스버’ 가 터지리라 귀를 세웠다.

 이이가? 왜 이려? 새애기 숭보너먼! 어머님 음성이 튀었다. 새애기? 아버님이 멈칫 내 쪽을 보셨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손사래 쳤다. 아버님이 내게 이거, 이거, 뭔가 흔드셨다. 아버님의 섬 친구가 들려준 건어물 꾸러미였다. 받아드는데 훅 갯내가 풍겼다. 왜일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은 아버님이 먼저 괜찮다고 하셨다. 새애기 나이 이미 쉰 초입, 아버님은 여섯 달 째 누워계시며 어머님께만 당신 방 출입을 허하셨을 때 내가 들어갔다. 아버님은 온몸으로 부끄러워하셨다. 난 갠찮응게 어여 나가봐. 어여. 문쪽을 가리키는 아버님 손을 끌어다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요. 아버님.

 그때 아버님은 이미 당신이 ‘가구 스버’ 하던 곳, 당신이 ‘보구 스버’ 하던 이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정말로 괜찮으셔서 괜찮다고 하셨을 것이다. 아버님의 ‘스버’들을 오래 간직하리라, 그땐 맘먹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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