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31회 신라문학대상] 차심 / 이상수

희라킴 2020. 2. 5. 21:13

[제31회 신라문학대상] 


                                                                     차심 


                                                                                                                                          이상수


 저걸 차茶의 마음이라 할까. 찻잔 안쪽에 무수한 금들이 그어져 있다. 촘촘하게 새겨진 무늬들이 물고기 비늘 같다. 찻물을 따르자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차심이란 미세하게 금이 간 찻잔에 찻물이 스며든 것을 말한다. 마름모꼴이거나 오각형 모양의 무늬들은 찻물에 담겨 있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통상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의 유약이 상온과 만날 때 생긴 빙렬氷裂에서 비롯되는데 얼음이 갈라지는 모양과 흡사하다. 차심은 빙렬을 타고 차가 오랫동안 스며들어 생긴 시간의 흔적들이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집은 한해 농사를 마감하고 고즈넉해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물리고 부녀가 마주 앉았다. 준비해 간 차를 마시며 저물어가는 들녘을 바라본다. 아버지의 얼굴은 몇 달 전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모습니다. 여든의 세월을 건너온 얼굴엔 주름이 빼곡하다. 이마며 눈가, 입가에 고랑처럼 패여 있는 이력들은 어떤 것은 깊고 어떤 것은 소용돌이를 이루기도 한다. 주름 하나하나마다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해진다.

 우리 삼 남매가 한창 공부할 시기에 낙농 파동이 일어났다. 공급과잉으로 우유가 남아돌자 회사에서는 납품할 수 있는 양을 크게 줄여버렸다. 추위와 새벽잠을 쫓으며 짜낸 우유는 고스란히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랑을 타고 흐르던 허연 우유는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 같았다. 게다가 사료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송아지 가격이 폭락했다. 하지만 남들이 서둘러 소를 내다 팔 때도 아버지는 가족 같은 젖소는 결코 팔 수 없다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

 어느 해는 애써 장만한 여러 마지기 논마저 태풍으로 휩쓸려 가버렸다. 벼와 자갈이 뒤엉킨 논바닥에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던 굽은 등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런 고비를 넘을 때마다 당신의 얼굴엔 하나둘 차심 같은 주름이 새겨졌으리라. 언젠가 가본 부석사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는 주름이 무수하게 나 있었다. 처마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도 있고 주춧돌에서 위로 올라간 것도 있었지만 서로 비껴가며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자연스러웠다. 나뭇결을 따라 굵고 가느다란 선이 촘촘하게 메우고 있어 마치 주름이 기둥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짧고 길게 그어진 선 하나하나엔 천삼백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눈, 비, 햇살과 함께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가 차곡차곡 쟁여졌을, 시간의 신전에 기대 몸속 깊숙이 전해져오는 어떤 장구함을 느꼈다.

 그해 여름, 열 살 된 막내가 떠나던 때는 연일 날씨가 가마솥처럼 절절 끓어올랐다. 바쁜 농사일로 식구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지만 아파 누워 있는 막내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을 맞은 우리도 제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다.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채 며칠을 앓다가 뒤늦게 병원으로 갔더니 모기에 물려 뇌염에 걸린 거라 했다. 미처 이별을 준비할 새도 없이 동생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미리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을까. 당신 가슴엔 평생 지워질 리 없는 가장 큰 주름 하나가 새겨졌다.

 언니의 재생불량성빈혈도 아버지에게 골 깊은 주름 하나를 보태고 말았다. 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니의 몸을 괴롭히고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고 싶다는 언니를 달래가며 희망을 걸고 말 혈청을 맞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한창 청춘을 즐길 나이에 시들어가는 딸을 보는 것은 통증 없이 바라보기 어려웠으리라.

 찻잔을 쥔 아버지 손등에 크고 작은 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씨 뿌리고 추수하며 지게 지던, 손바닥은 굳은 살로 투박하다. 어디 손뿐이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안쪽에도 수많은 굴곡이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리라. 자식이며 농사 걱정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당신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

 주름찻잔버섯은 내면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 포자가 성숙할 때까지 보호한다. 갓 태어난 버섯은 흰 막으로 덮여 있다가 포자를 날려 보낼 때쯤 열린다. 나비 날개에 퍼져 있는 주름은 햇빛을 흡수하고 체온을 조절한다. 식물과 곤충이 종족 보존을 위해 주름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의 주름은 어떤 의미일까.

아버지에겐 슬픈 주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해, 수십 년 살았던 초가를 허물고 근사한 집을 짓게 되었다. 솜씨 있는 목수에게 부탁해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었다. 바쁜 농사로 해가 짧아도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살폈다. 초가는 이 년 주기로 지붕을 새로 이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든든한 처마 아래서 가족이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땐 행복한 주름 하나도 가만히 새겨졌으리라.

  골수이식은 언니에게 건강한 삶을 선물해 주었다. 새 식구가 태어나고 아픔은 서서히 옅어져 갔다. 가끔 웃음 소리가 담장을 넘을 때 아버지의 얼굴도 활짝 펴지곤 했다. 차심이 찻잔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처럼 아버지의 삶도 기쁨과 슬픔으로 직조되어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내려놓은 찻잔 속에 늦가을 햇살이 담긴다. 고요하던 수면이 잠시 출렁거리다 이내 잔잔해진다. 아버지가 찻잔을 그러쥔다. 주름진 손등 위로 당신의 일대기가 고요하게 흘러간다. 모든 희로애락을 거쳐 산수의 나이에 이른 모습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다.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 거칠고 차갑지만 따뜻한 당신의 마음이 내 안으로 건너온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알싸해진다. 그윽이 바라보는 당신의 눈가로 쇠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다시 찻물을 따른다. 찻잔 속의 주름들이 더 선명해진다. 고요해진 그 안엔 아버지를 향한 작고 여리지만 따뜻한 내 마음도 몇 개 새겨졌으면 좋겠다. 문득 보이지 않는 손 하나가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린다. 연둣빛 둥근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