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애장산 / 박동조

희라킴 2019. 12. 9. 19:35

  애장산 박동조 고향 마을 뒷산 너머에 '애장산'이 있었다. 죽은 아이들이 묻혀있어 '애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붉은 비알에 드문드문 돌무더기만 보였던 산이 이제는 나무와 가시덤불 천지가 되었다. 성묫길로 보이는 외줄 여윈 길이 아니었다면 내 집 마당처럼 뛰놀았던 뒷동산을 한걸음도 밟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눈으로 덤불을 헤치니 비로소 세월에 삭은 돌멩이들이 '나 여기 있소'하며 삐죽 모습을 드러낸다.

 사춘기 시절, 마음이 울적해지면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바람이 골짝을 내닫는 소리를 들으며 아기들의 돌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고즈넉해졌다.

 나무는커녕 풀도 드물었던 황량했던 이곳에다 사람들은 왜 어린 주검들을 장사지냈을까. 돌이 많아 무덤을 만들기가 손쉬운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한스러울 어린 영혼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풀막진 이곳에다 장사지내고 돌로 꾹꾹 다져 눌러놓았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난 해에 우리 마을에는 열한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살아남아 어른이 된 친구는 네 명이었다. 세 살 때 천연두가 퍼져 일곱 명이 죽었다. 예방주사가 제대로 보급되기 전인 옛날에는 천연두, 홍역, 볼거리 같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많은 어린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 아이들도 이곳에 잠들었다. 동무라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으니 영혼인들 나를 알아볼까.

 내 나이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숙모가 돌잡이 아기인 사촌동생과 함께 우리 집에 머물렀다. 아기가 아주 많이 아팠다. 열이 올랐다 내렸다 했으며 '경기'를 거듭했다. 그때마다 어른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낮추었다 했다. 집안 가득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숟가락에다 '영사'라는 가루약을 물에 개어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아기의 입에서는 삼키지 못한 붉은 영사물이 피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럴 때마다 숙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단골무당을 불러 윗목에다 물을 떠 놓고 바가지를 두들기며 굿을 해봐도 아기는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그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먼 산에서 부엉이가 목이 쉬도록 울었다. 어른들이 아기가 갔다고 했다. 아기는 누워 있는데 왜 갔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방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에 자는 척 누워 있었지만, 내 귀는 연신 바깥쪽을 향해 쫑긋거렸다.

 큰방과 마루를 오가는 어른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바빴다. 소리는 섬돌로 옮겨갔다. 남자 어른들의 두런대는 소리가 숙모의 긴 울음소리에 섞였다. 커다랗게 울리는 발걸음소리가 멀어지자 숙모의 울음소리는 더 높아지고 더 길어졌다. 길고 긴 울음소리는 달빛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내 눈에도 까닭모를 눈물이 흘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큰방에 누워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아기가 죽으면 이튿날로 미루지 않고, 촌음을 다퉈 매장하는 오랜 풍습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철이 든 훗날에야 알았다.

 사촌 동생도 물동이에 담겨 부엉이의 울음과, 푸른 달빛의 조문을 받으며 이곳에 묻혔을 것이다. 아저씨들은 땅을 고르고 발로 다진 다음 돌멩이를 얹어 아기의 무덤임을 표시했으리라. 아기가 묻힌 곳은 장사를 지낸 사람 말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바람과 구름과 햇볕이 무덤을 찾아와 놀아주었을 뿐, 들꽃 한 송이 바치는 이 없었고 발걸음 하나 머물다 간 적 없었다. 숙모 역시 이곳을 찾지 않고 돌아가셨다.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숙모도 동생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애장산의 얘기는 전설이 되었다. 묘지를 덮었던 돌무더기에도 소나무, 아카시아, 졸참나무가 우거졌다. 아기의 무덤을 지키던 돌들은 풍화의 시간을 여행 중이다. 세월의 이끼를 켜켜이 둘러쓴 돌멩이들 위로 먼먼 시간이 쌓이고 나면 이곳이 어린 영혼들의 안식처였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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