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인카페
김응숙
하천을 따라 산책을 나선다. 운동도 하고 저 아래 무인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기 위해서다. 얼마 전부터 반복되는 일상이다.
하천은 완만하게 흐르고 있다. 늦가을이라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수심은 얕다. 갈대가 하얗게 사위기 시작하는 기슭에서 발목을 적시고 있던 재두루미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이제 곧 이곳을 떠날 재두루미는 갈대숲을 한 바퀴 빙 돈다.
나는 징검다리에 쪼그리고 앉아 돌 틈으로 빠져나가는 물살을 지켜본다. 징검돌들은 유유히 흐르던 물살을 긴 머리를 묶듯 질끈 묶는다. 물살은 결을 이루며 좁은 돌 틈 사이를 비집고 흐르더니, 이내 주름을 펴고 낭창거리며 흐른다. 오후의 편광이 길게 비친 하천은 곳곳이 희끗희끗하다. 마치 쪽머리를 푼 할머니의 머리타래 같아 보인다.
어느 해 겨울 돌연히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할머니가 머리를 감으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머리를 푸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비녀를 빼자 질끈 묶은 희끗한 머리타래가 하릴없이 툭 떨어졌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단히 옭아매었던 무언가가 대책 없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나는 시선을 돌리면서도 흰머리가 섞인 긴 머리타래가 방바닥을 구비 치며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흐르는 물 옆을 걸을 때만큼은 시간을 실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물살은 쉼 없이 시간을 하류로 실어 나른다. 멈출 수 없으므로 머물 수 없다. 나는 무인카페가 있는 하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천은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곳곳에 바닥을 드러낸 곳이 보인다. 그곳에는 갈대가 자라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뿌리께에 잡다한 것들이 엉켜있다. 찢어진 비닐이며 앙상한 살을 드러낸 망가진 우산도 보인다. 지난여름 태풍에 휩쓸려온 잡동사니들이다.
그러고 보니 하천은 시간만을 실어 나른 것이 아니다. 집중호우에 물이 불자 온갖 것들이 떠내려왔다. 평소에는 언제까지나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지친 몸을 뉘었을 안락의자도 보이고 작은 냉장고도 보였다. 도대체 이런 것들은 다 어디서 떠내려 오는 것일까.
내가 사는 아파트는 하천을 끼고 있는 부지에 세워져 있다. 호우경보 문자가 핸드폰에 뜬 날, 나는 큰 우산을 쓰고 나가 하천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신발 한짝이 하류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비가 그치자 수량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급류에 떠밀린 징검다리가 어긋난 이처럼 다시 돋고, 황토를 벌겋게 둘러쓴 산책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살에 떠내려온 것들은 기슭이나 하천 가운데 갈대숲에 그 남루한 몸을 부렸다. 시에서 나온 미화원들이 날마다 포대로 퍼 날랐지만 아직은 그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한 모양이다.
하천이 굽어지며 만들어 놓은 둥근 하천부지 한쪽에 '무인카페'라고 쓴 나무간판이 세워져있다. 카페라야 그저 컨테이너 한 동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공간이다. 누군가가 드나들며 돌계단도 만들고 자잘한 화분들도 갖다놓았다. 아침에 주인이 선곡해 놓은 음악이 하루 종일 반복되며 흐르고 있다.
기부함이라고 쓰인 나무통에 천 원을 넣고 커피머신을 눌러 원두커피 한 잔을 내려받는다. 세 개의 탁자와 여덟 개의 의자는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원목 의자도 있고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도 있다. 나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가 앉는다. 등받이를 그물처럼 짠 등나무 의자이다. 각양각색의 이 의자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카페의 주인은 뒤편에서 고물상을 하는 분이시다. 커피머신 옆에 '이 수익금은 불우 청소년을 돕는 데 쓰입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저 있는 땅에 컨테이너 박스 하나 놓고, 자신의 고물상에 들어온 물건 중 쓸 만하다 싶은 탁자와 의자들을 갖다 놓은 것이다. 제법 산책객들의 발길이 들자 주인은 진열장을 들여놓고 인테리어 삼아 이런저런 물건들도 올려놓았다. 하나같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다. 물론 이 모든 물건의 출처는 고물상이다.
그런데 이 무인카페에 앉아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느 물건 하나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 없다. 생각해보면 고물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다. 제각각 난 곳에서 이 고물상까지 흘러올 시간이 필요하다. 이토록 결이 삭을 만큼 나름의 사연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꿀꺽 가시를 삼키듯 이별이라는 순간을 통과의례처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빛이 바래고 모가 닳은 이 물건들은 시간의 물살에 완전히 떠내려가기 전에 카페 주인의 손에 의해 이곳에 부려졌다. 마치 계류장에서처럼 이들에게 잠시 휴식의 시간이 주어진다.
양쪽에 자개로 용을 새겨 넣은 명패가 보인다. 무슨 농협 모 이사장이라고 쓰인 명패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멀쩡하기는 하나 더 이상 쓸 것 같지 않은 그릇들, 노란 스웨터를 입은 금발의 인형, 하늘을 나는 자전거가 그려진 때 묻은 캠퍼스, 천 개의 종이학이 든 유리병, 나는 물건들을 눈으로 훑어본다. 도저히 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물건들의 공통점은 그저 시간의 물살에 떠밀려 왔다는 것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물살이다.
문득 나 또한 정처없이 떠내려온 것만 같다. 무수히 헤아리고 확인하고 인식했던 것들이 덧없어진다. 아무 맥락없이 놓인 이 물건들이 모든 관계가 사라진 시간의 끝에서 오롯이 홀로 존재해야 하는 한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공평한 고독이 되레 안심이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 나도 시간의 강, 그 하류로 떠밀려가고 있는 중인가 보다.
누군가 들어와 무인카페의 불을 켠다. 창밖이 어둑하다. 산책로에도 하나둘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 검은 물살이 흐르는 하천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간다. 뒤돌아보니 환히 불을 밝힌 무인카페가 마치 시간을 항해하는 배처럼 검은 물살에 떠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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