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연 밭 소묘 / 최장순

희라킴 2016. 11. 15. 18:27





연 밭 소묘


                                                                                                                                        최장순



  먼 가로수 소실점이 숨긴 길처럼, 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는 일 또한 재미없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연 밭으로 향한다.

 올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마음이었다. 흙탕물처럼 흐려져 바닥이 보지지 않을 것도 같았다. 어느새 달라진 계절이 이곳까지 당도했을까. 만평 연 밭 길을 걷고 있으려니 흐린 마음의 바닥이 조금씩 보이는 것도 같다.

 연 밭이 누런빛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 여름내 발갛게 밝힌 등을 거의 소등한 연 밭은 온통 기도처로 변해있다. 무엇이 저토록 간절할까. 연밥의 무거운 꽃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얼굴들, 밤낮으로 읊조리던 기도소리에 성대가 한껏 부어올랐을 연대, 죽으면 죽으리라, 모습마저 결연하다.

 몇 발짝 더 가까이 연 밭을 들여다본다. 관망하듯 바라본 기도모습과는 달리. 그곳은 거대한 인간 세상이다. 가득 고인 신비 속으로 점점 마음이 끌려들어간다. 내 안의 뜨거움도 조금씩 식어간다.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에, 에, 주민 여러분께 알려들립니다."

 발음이 세련되지 못한 이장의 가을소식이 녹​슨 마이크를 닮은 연밥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 어눌한 발성을 바로 잡아 주려는 듯 빈 꽃대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꽁무니를 들썩거린다. 어느 대목에서 쉼표를 찍어야하는지, 어느 대목을 강조해야 하는지 놓치지 않겠다든 듯 뙤록뙤록 눈망울을 굴린다. 보이는 나와 속에 숨은 나와의 갈등은 다 잊어버리라고, 땀 흘린 만큼 수확도 크리라고 가만히 들려주는 가을의 소리들, 여러 마이크의 소리가 잡음으로 들리기는커녕 한 채널, 한 마음으로 듣는 내 안이 고요해진다. 채 익지 않은 푸른 연밥은 우리 집 샤워기, 마침 가볍게 지나가는 비를 틀어 남은 미열에 쏴아, 들이붓는다.

 샤워기는 한줌 늦더위마저 지우고 비를 잠갔다. 연잎으로 튄 물방울들이 어느새 찾아든 성미 급한 햇살에 점점 박힌 보석으로 반짝거린다. 이파리에 고인 물이 수정처럼 맑다. 수정 속에 들어앉은 농축된 쪽빛, 잠시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쪽빛 하늘도 만평이다.

 이곳만큼 좋은 집터도 없다고, 왕거미가 집 한 채씩 지어놓았다. 이쪽 연대와 저쪽 연대가 기둥역할을 하는지 밑줄을 긋듯 거미줄을 쳐놓았다. 그것도 불안한지 보와 도리와 종도리를 얹듯 몇 겹의 줄을 왕복시켜놓았다. 그리고 공중에 마련해놓은 방사형 올가미, 단기매매차익은 물론 특별한 전망을 프리미엄으로 얹어준다고 마이크를 빌어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 다디단 소문을 덥석 물은 하루살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연대와 연대사이 한 겹 한 겹 하늘을 옥죈 포위망, 단숨에 공중으로 뛰어오르려는 야망이다. 낚아챈 거미집을 보며 어느 가장의 사연을 오버랩한다.

 불길함 한 무리가 먹구름처럼 몰려오던 그 날, 크레인소리는 멎고 하늘은 깜깜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 신문하단에는 건축조합장의 사기사건이 실렸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한 것 다 잊고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개미손들이 모은 돈으로 지은 집, 그러나 공중에 박은 무수한 못은 금세 녹이 슬었고 욕망은 끝내 기둥을 세우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었다.

 지금 저 거미집이 그렇다. 바람한줄 스치기만 해도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거미의 쪽에서 보면 단단히 욕망을 뻗은​ 집이다. 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은 이미 목숨이 끊겼는지 미동도 없다. 뒷면으로 돌아가 살펴본다. 거미는 집 중앙에 거꾸로 매달린 채 부지런히 입만 움직이고 있다. 하루살이의 입장에서 보면 거미집은 욕망의 덫이지만, 거미는 저 집을 짓기까지 여름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저만치 앞서가는 이가 있는가하면 걱정을 있는 대로 들여놓은 늦된 이도 있다. 늦어도 다 제 걸음 찾아간다는 어른들의 말을 이제야 믿는다. 여기 연 밭에도 그런 늦된 걸음이 있다. 다른 연대들은 누렇게 연밥을 매달았는데, 때늦게 꽃을 피웠다가 이제야 꽃잎을 떨군 연대, 푸른 보료 같은 연잎이 받치고 있는 두 장 꽃잎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미처 여름을 따라가지 못한 고무신 두 짝,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의 것일까. 차마 떨어지지 않던 걸음이 자꾸만 뒤돌아보는 듯하다. ​

 연밥에서 떨어진 연자들은 저 컴컴한 진흙탕에 묻힐 것이다. 화사한 웃음을 꽃피우고 벌 나비를 유혹했던 열정의 시간은 모두 지금을 위해 애쓴 순간., 오로지 썩기 위한,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요한 연 밭, 오락이 없고 특별한 소리도 없어 재미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곳, 그러나 귀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보이는 세상이 있다. 숭숭 뚫린 연밥의 구멍으로 우리들 한 생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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