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마음을 편집하다 / 노혜숙

희라킴 2016. 11. 15. 17:48



마음을 편집하다


                                                                                                                                          노혜숙

 

 들어가다

 그는 있다 없다. 보배다 화근이다. 행위의 실질적인 주범이다. 바다와 바늘구멍 사이를 무시로 왔다 갔다 하며 수많은 결과 층이 있어 종잡을 수가 없다. 아니, 그는 호르몬의 한 작용일 뿐이다….

 혹자는 그가 바람이 물(物)에 기대어 나타나듯 네 아(我)를 통해 나타난다고 한다. 네 아란 몸 나, 제 나, 참 나이다. 바람을 잡을 수 없듯 그 또한 그러하단다.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나 없는 그 것. 태초 이래 추측한 무성할 뿐 여전히 정체는 오리무중이고 아무도 그 형상을 명확하게 그려내지 못하는 그것. 어떤 이는 그를 찾아 들고, 어떤 이는 온 세상을 떠돌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를 마음이라 부른다.

 나는 수십 년 마음과 동거를 했으나 아직도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수없이 곁가지와 잔가지를 치면서 증식한다. 뿐인가. 수시로 속고 속이고 찌르고 찔린다. 직선이되 서로 찌르는 법이 없는 나무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중심을 향해 응집되면서 키와 품을 늘린다. 사람인 나는 근심만 무성할 뿐 마음 한 뼘 넓히지 못한다. 마음을 아는 일은 먼 산 나무를 아는 일보다 어렵다.

 

 엿보다

 새벽들이 일어난다. 작정하고 주방의 싱크대를 열어젖힌다. 주인의 손을 타지 않은 그릇들이 정물처럼 놓여 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누렇게 빛이 바래거나 기름때가 앉은 것도 있다. 단호하게 그릇들을 들어낸다. 버려질 그릇들이 큰 상자로 하나가득이다. 정리된 수납공간이 허룩하다. 속이 후련하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너무 많이 끌어안고 살았다. 비단 그릇들뿐이겠는가. 관계가 그렇고 습관이 그랬을 것이다. 공연히 삶을 번거롭게 하는 것들에 치여 내가 잃어버렸을 마음이며 시간은 또 얼마일 것인가.

 그릇들처럼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 중에는 묵혀지고 잊힌 것들이 많다. 어떤 의미로든 한때 내 안에 들여진 것들일 테지만 이젠 더 이상 내 인생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관객들이다. 과거형이 된 것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또 그것으로 족해야 함을 안다. 무의미한 숫자로 남아 있는 관계들을 영구 삭제한다. 문제는 마음이 지우지 못하는 기록들이다. 이따금 각을 세우고 의식의 표면으로 출몰하는 기억들. 의식을 밀고 가는 힘은 무의식이라던가. 마음을 비우지 못한 그릇정리나 숫자의 삭제, 실체는 놓아두고 그림자만 지운 격일 테다.

 

 나오다

 찌들고 찌든 마음을 삶는다. 일회성일망정 나름 정화를 위한 작업이다. 고통이라는 고농축 세제를 낳고 온도를 최대한 높인다. 부글거리며 마음이 끓기 시작한다. 부풀어 오른 거품이 차고 넘칠 듯 가슴을 압박한다. 어설프게 끓이면 변질되기 십상이다. 인내의 한도를 최대한 높이고 최소한의 숨만 붙어 있을 때까지 견딘다.

 마음의 땟국은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불기운을 조절하면서 펄떡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오래 끓인다. 아뜩해지는 통증 속에 불순물이 증발한다. 잡념이 사그라지고 누르스름하던 마음 빛깔이 조금씩 제 색을 찾는다. 한소끔 뜨거운 감정을 빼내고, 진한 얼룩으로 남아 있는 상처 부위의 흔적을 힘껏 문지른다. 흐르는 물에 흔들고 또 흔들어 맑은 물이 나도록 마음을 행구고, 마지막까지 변장술에 능한 집착의 관성을 쥐어짜 제거한다. 잔여의 습기마저 햇볕에 온종일 널어 말린다. 잡것이 빠져나간 심(心), 가볍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 바닥이 가르쳐주었다 / 마경덕  (0) 2016.11.17
연 밭 소묘 / 최장순  (0) 2016.11.15
숟가락 / 최장순  (0) 2016.11.14
약속 / 장영희   (0) 2016.11.13
십구공탄 / 류영택  (0) 2016.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