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숟가락 / 최장순

희라킴 2016. 11. 14. 17:59

 


숟가락


                                                                                                                                    최장순


 수액 몇 개가 링거대에 달려있었다. 기력을 채우기 위한 링거주사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노인의 목에 호스가 꽂혀있고 그 관으로 가족이 유동식을 흘려 넣고 있었다. 숟가락을 놓은 노인의 삶은 죽음 쪽으로 더 쏠린 듯했다.

 

 숟가락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 객관화된 일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주체적인 삶의 행위인 숟가락질, 손가락과 손목관절이 동원되는 하루 세 번의 노동은 그래서 신성할 수밖에 없다. 아니 거룩하다고 해야 마땅할지 모른다. 기력이 떨어질 것 같으면 몸은 수시로 신호를 보내고, 숟가락의 노동은 바로 시작된다. 식은 방을 덥히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듯, 숟가락질은 몸에 불을 지피는 의식이다. 때 맞춰 비워지는 위胃지만, 그것을 채우지 않고서는 다른 즐거움이 생기지 않는다.

 직선의 끝에 붙어있는 이파리 한 장, 30그램의 밥과 5그램의 국을 뜰 수 있는 오목한 잎, 그렇다면 아파트 저편 숲은 얼마나 많은 숟가락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무는 무엇이 숟가락 역할을 하는 것일까. 숟가락을 닮은 물음표가 나의 호기심 언저리를 서성인다.

 어떤 이는 양분을 길어 올리는 나무의 뿌리가, 또 어떤 이는 햇볕이나 빗물을 받는 이파리가 숟가락이라 말할 수 있겠지. 바람과 햇살과 공기를 고루 떠먹는 나무도 우리처럼 스스로의 수저질로 영양을 조절하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뜨거우면 바람으로 식혀먹고, 목마르면 비로 갈증을 달래기도 하면서. 그러나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식사는 가뭄에 목이 타들어 갈 것이고, 장마엔 허천나게 물을 들이킬 것이다. 숟가락질이 어려워진 나무는 어떨까. 언젠가 본 병든 소나무는 종족번식의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평소보다 배나 많은 솔방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마치 환자가 여러 개의 링거로 연명하듯.

 천변의 왜가리와 오리를 보며 숟가락을 떠올린다. 머리에서 목으로 연결된 부분은 히브리 문자 같기도 하고, 숟가락 모양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부리가 수저 역할을 하고 있는 셈, 자칭 '움직이는 숟가락'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수저는 그 용도에 따라 다양하듯 오리는 주걱 모양이고, 독수리는 갈고리, 참새는 기호∠와 닮았다. ​반면 벌새는 참새의 그것보다 가늘고 길다. 부리를 물속에 넣고 저으면서 먹잇감을 찾는 저어새는 '숟가락부리'라는 뜻의 스픈빌(spoonbill)이라 불린다. 음식이 가깝거나 먼 것에 따라 숟가락의 길이가 달라지듯, 새들의 목과 부리도 먹이를 구하기 쉽게 발달했을 것이다.

 먹고 일하고 잠드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쉽게 잊고 살았다. 삼시세끼 밥 굶지 않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던가. 때마다 가지 끝에 꽃을 피우는 나무, 봄날 길섶에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는 얼마나 치열했는가. 물에서 열심히 주걱질 하는 오리의 몸짓은 또 얼마나 경건한 일이었던가.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작은 새들, 그것이 비록 하루살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방해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먹는 일의 충직한 시종侍從, 숟가락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허기는 공포다. 기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숟가락을 들 수 없을 때, 비로소 허공을 채우려는 욕망이 불가한 허망임을 알게 된다. 이립옹李笠翁은 '조물주로부터 받은 인체의 기관 중에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입과 밥통'이라 했다. 그것이 있어서 먹어야하는 문제가 복잡해졌다고 한 것은, 먹는 일의 거룩함을 역설적으로 풀어 낸 말이리라. 가사에서 손을 뗀 연로한 어머니는 때마다 밥상에 수저를 놓는 일을 고집하셨다. 자식들에게 손수 밥을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그 거룩한 일을 숟가락을 놓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은 간절함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

 어떤 음식도 너그러이 떠안는 포용은 숟가락의 미덕이다. 음식을 찍는 포크나 집는 젓가락과 달리 따뜻함과 정성을 담아낸다. 병든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다시 숟가락을 들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주는 일, 옛사람들이 숟가락을 무덤까지 가져간 것은 죽음이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받는 밥상이나 사후에 받는 제사상이나 수저와 저분이 놓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늘 제 수저를 소지하는 이들이 있다. 정갈하게 포장지로 씌운 음식점의 수저마저도 믿지 못한다는 그들, 수많은 입을 맛보았을 공용의 수저는 내 것이 아니어서 나만을 위한 식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야전 생활에 익숙한 병사들은 숟가락을 늘 군복 앞주머니에 지닌다. '총은 잃어버려도 숟가락은 잃어버리지 말라'는 농감처럼 수저는 몸의 분신인 셈이다. 여든여덟 번의 일손으로 짓는다는 쌀농사, 황송한 밥상 앞에서 누군들 공순히 수저를 집지 않을 수 있으랴. 먹는 일의 경건함은 숟가락을 듦과 동시에 가지는 마음가짐이다. 그래서였을까. 최고의 보시布施는 상대의 손을 잡아끌어 숟가락을 쥐어주는 것이었다. 음식을 깨작거리면 '복 달아 난다'고 어른들이 불호령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상추에 밥을 얹고 고추장을 찍은 삼겹살 한 점을 보태 큼직하게 쌈을 싼다.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맛나게 먹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쓸쓸히 숟가락을 놓고 있을 것이다. 밥통을 채우는 즐거움과 그것을 채울 수 없는 슬픔을 지켜보는 숟가락, 철이 든다는 것은 그 작은 숟가락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리라.

 오늘도 밥상 앞에서 공손히 숟가락을 집는다. 아니, 숟가락을 모시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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