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
김응숙
늦여름 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변덕이 심한 애인마냥 저만치 달려갔다가 후다닥 되돌아와 안기곤 한다. 그럴 때마다 포장마차 안주인은 비닐포장을 걷었다 내렸다하며 부산스럽다. 그 바람을 타고 백열등 불빛도 조금씩 흔들린다.
비에 젖은 보도에는 은행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나의 긴 그림자는 플라스틱 간이의자 밑에 깔려 있다. 파전 한 접시와 막걸리 한 통이 놓인 탁자 위로 팔을 뻗어 빈 잔을 채운다. 지하철 종착역인 노포 종점 포장마차에서 나는 그와 술 한 잔을 나누고 있다.
흔들리는 빗줄기에 밀려오고 쓸려가던 건널목에서 누가 먼저 알아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왕좌왕하다 어떻게 건널목을 다시 건너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요량으로 가지고 나왔던 한쪽이 기울어진 우산과 비에 젖어 찌그러진 낡은 구두가 꿀꺽 삼킨 생선가시처럼 목젖에 걸린다.
아직 가을도 아닌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바람에 쫓긴 빗줄기가 다급하게 보도블록 위를 훑는다. 마치 뭔가가 휩쓸려가 버린 듯 잠시 거리게 휑하다. 비에 젖은 몇 장의 나뭇잎만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세월도 저렇게 지나갔는가 보다. 토막 난 몇몇 기억만이 저 나뭇잎들처럼 시간의 저편에 달라붙어 있다. 바깥을 보던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반백의 머리카락이 보인다. 어깨에 떨어진 빗방울로 셔츠가 얼룩져 있다. 무릎 위에는 그의 큰 손이 어정쩡하게 얹혀있다.
갑자기 고도를 높인 비행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조금 먹먹하긴 하다. 그렇다고 그가 나의 첫사랑인 것은 아니다. 가난이 젊음의 윤기마저 말려 버린 시절, 팍팍한 청춘의 한 자락에서 설익은 조밥처럼 겉돌며 서로 눈치만 살피던 사이였었던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지금 이 빗줄기처럼 오락가락 하였을 게다. 어쩌면 이 말도 정확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흔히 추억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지 않던가.
한두 번 담장에 나뭇잎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골목길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몇 권의 책을 빌려 주거나 받거니 하였으리라. 헤진 작업복 앞섶을 두 손으로 여미고 머쓱하게 서 있는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이 잠시 눈앞을 스친다. 고아원에 근무하던 나를 찾아 거제도에 왔다가 돌아가는 뱃머리에서 손을 흔들던 그가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던 길이냐고 서로 묻는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를 두고 어긋난 조각들을 내놓으며 퍼즐 맞추기를 한다. 퍼즐은 거제도 선착장으로 맞추어졌지만 여전히 그는 떠나는 배에 있고 나는 부두에 있다. 막걸리 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다. 가슴께로 아릿한 술기운이 퍼진다.
아득히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마주한 기분이다. 긴긴 궤도를 달려온 열차가 어느덧 종점에 다다라 정지하는 것처럼 잠시 시간이 멈춰 선다. 분명히 서로 다른 노선의 열차를 타고 도달한 종점이건만, 왠지 세월의 궤적들이 닮아 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역사 출입문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사내가 꽁초를 발로 비벼 끈다. 의뭉하게 솟아나는 미련에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발끝에 힘을 준다. 밤도 늦었고 비도 오는데, 저렇게 밟아대지 않아도 불씨는 꺼질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지하철이 도착했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버스 정류장으로 몰려간다. 몇몇 사람들은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나는 괜히 그들의 면면을 살핀다. 후둑거리는 비와 이따금씩 몰아치는 바람에 옷자락이 나뭇잎처럼 펄럭인다. 맞은편 붉은색 신호등을 바라보는 그들의 그림자가 빗물에 번들거린다.
신호가 바뀌자 모두들 서둘러 건널목을 건너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리라. 문득 시간이 많이 늦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막차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옆자리의 사람들이 일어서는 기척을 빌미삼아 나는 가방을 챙겨 든다. 그도 일어나서 우산을 챙겨 준다. 계산을 하고 가벼운 악수를 하고 어색한 이별 인사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잘 먹고 간다고 포장마차 안주인에게 건네는 인사보다도 더 엷은 소리라 곧 저 빗줄기에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막차의 혼곤한 귀로에서 쏟아지는 잠 속에 묻혀버리리라.
종점은 그런 곳이다. 오고 가고, 가고 오다 결국은 비에 젖은 어깨로 흰머리 흩날리며 조우를 한다. 길고긴 여정 끝에 마침표 같이 다다른 종점에서 한 개비 담배로 미련을 비벼 끈다. 시간이 고인 웅덩이 같은 이곳이 잠시 머물며 막걸리 한 잔에 조금 취기가 오른들, 조금은 가슴이 아린들 괜찮은 것이다. 집으로 밖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종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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