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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를 쓰면서 왜 읽지는 않는가 / 최홍석

희라킴 2016. 3. 16. 07:24

 

시를 쓰면서 왜 읽지는 않는가

 

 

                                                                                                              최홍석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기성작가를 포함해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는 문학 카페가 여러개쯤은 될 것이다. 사실 여러 카페에 활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블어 일일이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댓글을 쓴다는 것 역시 시간상 여건이 허락치 않음을 알고 더구나 글을 써야하는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활동할 수 있는 범위의 폭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필자 역시 가입된 카페가 문학카페를 포함해 그 밖의 시사, 정치, 경제, 스포츠등 모두 합하면 가입 되어 활동하고 있는 카페가 이십여개 가까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가입된 카페 어디에 가더라도 필자의 흔적은 거의 없다. 이는 필자가 글을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을 올리기보다는 독자로서 찾기 때문이다. 글을 자주 습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읽지 않고 습작만 하는 작가는 스스로 교만에 빠질 위험에 노출 되어있다. 교만은 자만이다. 자만은 곧 자신의 글 생명과도 연결이 된다. 이것은 스스로 발전을 저하시키는 것과 같다. 필자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많은 기성, 또는 일반 아마추어 작가들의 글을 보아 오면서 한가지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시가 발전이 없고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다. 이는 타인의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읽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읽지 않고 눈으로 읽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류가 유지해 온 정신 활동 영역 중에서 가장 오랜 연원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인문 분야에는 문학 외에도 철학, 역사, 심리학 등이 있지만 문학만큼 구체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개인과 사회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 즉, 문학은 인문 분야의 기본 토대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문학의 작용은 인간 역사나 인간 사상의 형성 및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에 가장 먼저 불을 지피는 공간이며, 동시에 인간 세계를 가장 마지막까지 정신의 불로 조명해 주는 공간이다. 더블어 나 속의 나, 즉 정신적인 대화를 통해 문학의 지식과 함께 성숙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필자가 묻는다. 기성작가이던, 일반작가이던 문학을, 시를 얼마큼이나 알고 쓰는가이다. 시의 기본적인 이해도 못하면서 글을 쓰고, 그런 글을 인터넷에 올려 누군가 읽어주길 기대하며 글만 올리고 나가는 당신은 아니였는지 가슴에 손을 올려 봄은 어떨까? TV광고에도 나오는 말귀처럼 "나 하나쯤이야"하는 안일한 생각 한 명이 모여 백 명이 되고 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되어 지금 인터넷에 올려진 수 많은 글들이 짧다, 가볍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 사회에 태어난 한 개체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지적 발달을 돕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학 읽기는 그 사람의 정신적 발달의 국면마다 개입하여 가치 있는 영향을 미친다. 기본적으로 생존하려는 최소한의 욕구와 생존할 수 있는 조건 및 환경을 확보하려는 데서 실용적인 의사 소통의 언어가 출발하는 것이라면, 자아를 인식하고 표현하며 더 나아가 세계를 발전하려는 최소한의 욕구를 나타내려 할 때 주체화되고 상징화된 언어, 즉 문학의 언어가 등장한다. 문학은 이렇게 우리에게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미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손에 책 한권 없고 타인의 글을 읽지 않는사람의 삶은 자신의 내면속에 이기주의와 시기심만 가득할 수 밖에 없다.

 한가지 예로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으라고 주문한다.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보다 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눈으로 읽는 아이와 읽고 독후감을 쓰는 아이와의 차이는 크다. 책을 읽고 자주 독후감을 쓴 아이는 훗날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과 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글을 써도 자신의 가치관과 내면세계를 확연하게 표현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그러면 눈으로만 읽던 아이는 훗날 어떤 아이가 될까. 필자가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구나 책을 아예 읽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문학은 인간이 유년기부터 세계를 인식하는 창(窓)과 같다. 유년기부터 세계를 질서화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왜 `이야기` 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편화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문학의 형상적 매력과 이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자라서 성장기에 정신적 긴장과 현실세계와의 충돌을 경험할 때, 우리는 많은 성장 소설들에서 위로를 받고 자신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 이는 '교사이기를 사양하는 교사'의 역할을 문학이 수행하고 있음을 문학 읽기의 구체적 경험이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현실주의 텍스트, 이를 테면, 염상섭의 '삼대'(필자는 이 책을 12번이나 읽었다.) 나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작품등을 통해서 총체적인 세계인식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청장년기의 성숙을 경험한다. 이는 외부의 사회적 현실 속에 주체로서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실천으로서 문학의 자장(磁場)이 만들어 지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인생의 나이테를 다스림직한 원숙기쯤에 신화나 서사시의 세계를 온전히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신화 세계가 가지는 조화스러운 총체성의 질서를 제대로 음미하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생애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문학을 통해서 우리가 선대(先代)로부터 이어받고 후대에게 넘겨줄 문화적 유산이 형성된다. 이른바 삶과 인생의 지혜로서 문학이 위상적 변이를 겪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만나야 하는 가치 있는 경험의 보고 그 자체이다. 그리고 개체 차원에서 충실하게 경험된 문학의 발효에너지는 사회와 역사 차원으로 그 가치가 전이된다.

 필자가 논평했던 '독자가 시인이 되는 세상'중에서 작금 문학의 형태가 상업적 위주로 흐르는 문단의 현실이 지금과 같은 어설픈 작가들의 글이 생산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역사가 말하듯 민주화를 위해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싸워왔던 그 한사람으로 인해 지금의 민주화가 되었다.

 진정 문학을 사랑한다면 후대에 부끄럽지 않는 자로 이제부터라도 글다운 글을 쓰는 당신이길 필자는 희망한다.

 

 

출처: 다음카페 '시인회의'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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