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부방

풀 / 김수영 (이어령 교수와 문태준 시인의 해설)

희라킴 2016. 6. 16. 06:41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문태준·시인의 해설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꺾임이 없는 ‘둥근 곡선’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새날이 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픔과 어제의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눈사태를 뚫고 산정(山頂)을 찾아가는 산악인처럼.

 타계한 해에 발표된 ‘풀’은 김수영(1921~1968)의 마지막 작품이고, 우리 시대 100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이기도 하다. 올해로 40주기를 맞은 김수영은 전위적 모더니즘으로, 4·19 혁명 이후에는 참여시(詩)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시는 사람들 가슴 속에 눕고 울고 일어서며 푸르게 살아 있다.***


이어령 교수의 해설

순응하듯 저항하는 `풀들의 혁명'
형용사 안쓰고 부사로
풀들의 미묘한 변화 표현

 왜 당구대는 초록색인가. 이상스럽게도 카드놀이나 룰렛판이나 서양의 놀이판은 모두가 초록빛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유럽의 색채]를 쓴 미셀 파스투로는 그것이 16세기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고 말한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푸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골프를 하는 스포츠를 보면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는 농작물을 기르는데는 적합치 않지만 양떼나 젖소가 뜯는 목초를 기르는데는 이상적이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의 생활은 목장의 풀밭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서구문학에서는 풀이 생명과 활력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월트 휘트먼의 [풀잎]이다. 서구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아온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당구대에 깔린 초록색 나사는 지금도 집집마다 잔디를 심는 서양사람들의 풍속처럼 초지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목장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읽기는 당구대의 놀이판과 대단히 흡사한데가 있다. 풀에 대한 그리움과 찬양만이 아니라 당구대 위에 흩어진 당구공처럼 그 시인의 언어 역시 희고 붉은 양색깔로 선명하게 나뉘어 있다.

[날이 흐리다] [바람이 불다]와같이 기상조건을 나타내는 말들이 [흰 공]이라면 풀에 관한 말들은 그와 대비를 이루는 [붉은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는 [바람]과 [풀]의 두 언어가 서로 부딪칠 때 생겨나는 [눕다]와 [일어나다]의 서술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 시에는 거의 명사 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동사)에 관련된 부사들은 도처에, 그리고 시적 메시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등장한다.

 풍미한다는 한자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람이 불면 모든 풀잎은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나부끼며 쓰러진다. 풀이 눕는다는 것은 곧 바람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풀의 패배이며, 일종의 작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풀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생명과 자유를 되찾는 것이며, 독립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승리인 것이다. 이렇게 눕다/일어서다의 대립항을 어떻게 선택해 가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그 언어의 공이 굴러가는 성질과 속도, 그리고 그 방향과 미묘한 부딪침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부사가 당구대의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눕다에 중점을 둔 1연의 풀들을 보면 안다. 그 풀들은 바람부는 대로 움직인다. 바람의 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억눌리고 쓰러지는 순응의 풀이며 수동적인 풀이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는 그 시행은 계속 그 뒤에도 [나부끼다]와 [울다]로 이어져 갈 뿐이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드디어 울었다]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에서 [드디어] [더] [다시]와같은 부사가 누워있는 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미묘한 움직임의 변화를 나타낸다. 드디어 울었다는 것은 참고 있었던 풀의 의지를, 그리고 [더 울었다]는 증대되어가는 좌절의 의미를, 그리고 [다시 누웠다]의 그 다시는 계속 일어나려고 노력하던 풀의 잠재된 행위와 그 지속성을 묻어둔다.

 그래서 풀의 의지를 숨겨두었던 그 부사들이 2연째에 오면 [빨리]와 [먼저]로 발전해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와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운다]의 능동적인 풀을 만들어 낸다.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는 것은 수동적이었던 풀이 이제는 자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능동적 풀로 변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람과 풀의 행위는 이미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같지 않은 속도의 그 작은 틈새속에서 [풀]의 자유와 의지가 번뜩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이다. 일어난다는 것은 저항이며 생명이며 희망이자 승리이다. 그것은 풀들의 작은 혁명이다.

 눕다/일어나다의 대비를 극대화한 것이 3연의 풀이다. 1연의 바람에 눕는 풀이 2연에 오면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로, 그리고 그것이 3연에 오면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풀이 된다. 그래서 이 전체의 시적 구조는 음악용어로 말하자면 크리센도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1연의 나부끼는 풀이 3연에서는 뿌리째 눕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람의 강도와 흐린 날씨의 정황은 [발목까지] [발밑까지] 내려와 결국엔 [풀뿌리가 눕는다]로 증대된다.

 풀뿌리가 눕는다는 말은 이미 그 풀이 단순한 식물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풀의 경우는 뿌리가 뽑히는 경우는 있어도 바람에 눕는 일은 없다. 그래서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풀뿌리처럼 이풀들은 식물 언어에서 정치적 이념어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바람에 눕는 1연의 사실적인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는 2연의 비사실적인 풀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3연째의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반사실적인 풀로 바뀌어가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눕다/ 일어서다의 대립적 행위를 수식하는 언어들 역시 [다시]에서 [빨리]로, 그 [빨리]에서 [늦게]로 바뀌어 지면서 시 전체의 긴장과 풀의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눕다와 동격인 [운다]란 말이 3연에 오면 웃는다로 바뀌고 바람과 풀의 대응관계를 나타내는 비교어 역시 빨리/늦게, 먼저/늦게의 대비로 무력한 풀의 의미를 반전시켜 [거대한 풀뿌리]를 만들어 낸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한 이 시가 마지막에 오면 [풀뿌리가 눕는다]로 그 상황이 한층더 가열한 것으로 변해 있는데도 [우는 풀]은 [웃는 풀]로 변신되어 있다. 김수영의 식물원에서 자라는 풀들은 이파리를 나부끼게하는 바람보다도 뿌리를 흔들어 놓은 바람속에서 더욱 자유롭고 강한 풀이 되는 까닭이다.

 풀을 압도하고 압도하는 바람, 이파리와 줄기와 그 뿌리까지 누이는 거대한 바람의 힘, 그리고 비를 몰고 오는 흐린 날의 기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 풀이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풀뿌리라고 한다면 그 바람과 흐린 날은 민초, 그 당시 유행하던 말로 하자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 생존을 위협하는 정치세력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런데도 김수영 시인의 언어들이 다른 정치이념을 구호화한 시와 비교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뻔한 알레고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예츠의 말이었던가. 시를 쓰는데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당구는 직선운동이면서도 그것을 치는 큐의 변화에 의해서 그리고 쿠션을 이용한 간접적인 작용에 의해서 표적구를 때린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총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구대의 큐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흰공 붉은공의 그 단순한 도식의 언어들을 갖고서도 무한한 변화와 우연성, 그리고 최대의 유희성을 획득한 초원의 시학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