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부방

2016년 신춘문예 시인들의 시 / 박남희

희라킴 2016. 6. 15. 12:28

분열된 목소리, 탈과 거울과 안개의 세계

-2016년 신춘문예 시인들의 시


박남희(시인, 문학평론가)

 

 

   1.가면의 웃음, 혹은 울음의 사회학

 

   가면을 쓰는 행위는 그 가면 뒤에 감추어진 존재를 은폐하거나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우리는 춤추는 하회탈을 보면서 웃음의 뒤에 감추어진 은유적 의미를 궁금해 하고, 복면가왕을 보면서 가면 뒤에 감추어진 목소리의 주인공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문단에서는 매년 신춘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수의 신인들이 등장한다. 복면가왕의 무대에 오른 가수들이 일정한 실력을 검증 받은 자들인 것처럼, 신춘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신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검증 받은 시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춘 시인들은 등단 후 주어지는 몇몇 잡지의 지면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진짜 목소리를 재차 검증 받게 된다.

   이번에 ‘시산맥 신춘문예 특집’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원고들은 저마다 독특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목소리를 통해서 가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가면의 뒤에 숨은 주인공이 진짜 가수인지 의심을 받게 된다. 신춘문예가 백일장이 아니라 공모전이라는 점에서 당선작의 진정성은 몇 해에 걸쳐서 발표되는 작품들을 통해서 새롭게 검증 받게 된다. 이번에 시산맥의 지면을 통해서 새롭게 선보이는 신춘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중앙지와 지방지의 수준차이가 별로 없고, 어떤 경우는 그 기대가 역전되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우리문단의 오랜 관행이 되어온 중앙지 우대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년 새롭게 만나게 되는 신춘 시인들에게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완성된 신인들은 아니지만 미명의 어둠을 딛고 반짝이는 아침물결처럼 더 넓고 깊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는 새로운 물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신춘 시인들의 새로운 시를 어떠한 독법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앞서 그들의 시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출발점에 작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한다.

 


강물은 흘러간다 이것은 오해다 밀고 밀리면서 강물은 우왕좌왕 하고 있다

 

강물의 반짝임, 그거 오해다 강물은 등에 꽂힌 따가운 시선으로 떨고 있다 강물은 무작정 따라나선 낡은 스란치마의 추억, 헤진 금박을 물고 반짝거리고 있다 강물은 반짝거림들의 오래된 배후지만, 오해다 강물은 우울하다 잊을만하면 피는 물가의 꽃들처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순간순간의 반짝임들, 오해다 오해의 물결이다

 

구두를 벗어든 자들처럼 햇살이 강물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 때 수심을 재고 있는 당신의 근심, 오해다 당신의 구두코가 오해하기 좋게 반짝거린다 강변의 오해란 물이 닿는 순간의 불, 불이 닿는 순간의 물처럼 반짝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해다 오해의 구두를 신고 당신과 내가 반짝하고, 파문을 일으킬 때 쏟아질듯 출렁거릴 때 빛과 그늘이 묻어 있는 강변 누가 당신의 명암을 재빨리 스케치하고 있다 당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반쪽처럼 반짝, 웃는다

 

우리가 조금 흐른다

 

                                                                    ―변희수, 「착시」 전문

 


   우리의 삶은 착각과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마치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는 아우성 같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 강물의 반짝임을 시인은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기에 앞서 ‘등에 꽂힌 따가운 시선’으로 인식하고 불안에 떨고 있다. 여기서 ‘따가운 시선’은 ‘무작정 따라나선 낡은 스란치마’나 ‘헤진 금박’의 구체적 경험들과 연계해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오해는 화자의 삶이 “잊을만 하면 피는 물가의 꽃들처럼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순간순간의 반짝임들”로 인해서 지속된다. 이 시의 3연 ‘반짝이는 구두코’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에 대응되는 이미지로 화자의 오해를 부추기는 중심 이미지이다. 그런데 강물이나 구두코가 햇빛에 빛나는 것이 아름답거나 즐겁지 않고 화자에게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모습을 강변의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반쪽처럼’ 웃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조금’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강물이나 구두코의 반짝임은 화자에게는 일종의 가면이다. 화자는 그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얼굴의 불안한 표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대상을 피상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속에 숨어있는 새로운 표정을 읽어내려는 시인의 노력에 기대를 걸게 된다.

 


편지를 불태우며 달리는 기차가 만들어지고 있다. 당신은 틀린 맞춤법을 사랑하지. 나는 글자를 거꾸로 쓰는 연습을 한다. 내가 쓴 편지가 불타지 않는다.

 

장마가 오고 있어. 예감은 쉽게 예언으로 바뀐다. 모든 거짓말은 진실이 될 수 있다. 편지봉투에 가명을 쓴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애초에 둘로 나뉜 적이 없잖아.

 

당신과 나는 쉽게 우리가 된다. 유언장에 내 이름을 써 줘. 당신은 유리창에 엑스를 그어놓고 구원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유리조각을 나눠 먹는다. 서로의 이름에 구멍을 내며 돌림노래를 부른다.

 

청각이 통각으로 변한다. 기차는 곧 출발할 것이다. 기관실은 오른쪽에 있으나 당신은 왼쪽으로 들어간다. 돌림노래인 적 없다는 듯 노래가 끊긴다. 문을 닫기 전 찰나의 표정.

 

내게 당신의 표정이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맞다.

 

편지가 불타기 시작한다.

가명 위에 가명을 덧쓴다.

개에게는 개의 혀가 필요하듯

 

                                                      ―안지은, 「장례」 전문



   이 시는 편지를 불태우는 행위를 일종의 ‘장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첫 연에서 “편지를 불태우며 달리는 기차가 만들어지고 있”는 행위는 사랑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세목들이 들어있는 편지는 ‘틀린 맞춤법’으로 되어있거나 거꾸로 써진 글자로 되어있어서 사실은 불타지 않는다. 이런 어긋남은 편지봉투에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이름을 가명으로 쓰는 것이나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유리조각을 나눠 먹는” 행위를 통해서 좀더 구체화된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 노래를 나누어 부르는 ‘돌림노래’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돌림노래도 마침내 끝나버리고 그 노랫소리를 듣는 청각이 통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듯 고통으로 변해버린 채 끝끝내 어긋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으며 ‘장례’와도 같은 것이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데서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이 시의 장점은 사랑을 매우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인데,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유리조각을 나눠 먹는” 행위처럼 현실성 없는, 관념적인 진술은 옥에 티처럼 보인다.

 


은밀한 약속을 좋아하지만 비밀은 싫어해요

 

빨간 구름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 약속을 파란 카페로 알고 파란바지를 입고 나간 적이 있어요 권총을 보고 보급형 굴뚝이라고 우긴 적이 있어서

 

권총은 싫어하지만 보급형이라는 말은 좋아해요

 

지금은 오후 3시인데요

 

비밀을 생산하기 좋은 시간이군요 그녀는 꼬리치레개미를 쫒아가요 습관이구요 진실에 가까운 거짓말을 골라내는 오후 땅콩 껍질이 붙어 있는 빈 펩시콜라 캔이 발 앞에 와서 멈춰요 가볍게 굴러 온 캔을 내려다보는 일은 일주일치 노동이죠

 

오후가 어둠 쪽으로 머리를 틀어요 어둠은 쫀득한 젤리처럼 올 테죠 그러면 잠을 일시적 검정이라고 고쳐보는 어둠의 색상표는 올이 나간 스타킹 같아서 어둠 한 올을 미리 버려요

 

                                                   ―이은주, 「오후 3시에 할 수 있는 일들」 부분

 


    인용 시에서 오후 3시는 화자가 ‘비밀을 생산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것은 ‘은밀한 약속’과 관계된 것으로 화자에게는 무언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이다. 하지만 화자에게 은밀한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은밀함을 꿈꾸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시에 의하면 화자는 파란색을 선호하고 상대는 빨간 색을 좋아한다. 빨간 색이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상징한다면 파란색은 이성적인 색깔이다. 화자가 “은밀한 약속은 좋아하지만 비밀은 싫어”하는 것도 이러한 취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취향은 ‘권총’과 ‘보급형 굴뚝’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권총’이 무언가 위험한 이미지를 풍긴다면 ‘보급형 굴뚝’은 어딘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권총’을 굳이 남성의 은유로 보지 않더라도, 두 사람 간의 시각의 차이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결국 그녀는 꼬리치레개미와 같은 그의 말에 이끌려 따라 나서지만 ‘진실에 가까운 거짓말’을 골라내는 그의 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은밀한 사건은,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어를 찾다가 해가”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의 남녀관계는 깨어진 거울처럼 끝끝내 봉합되지 않는 두 사람의 상이한 연애 성향에 의해서 좌절 된다.

 



    2)깨어진 거울-관계의 어긋남과 허위의식


    젊은 시절엔 누구나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게 되지만 그 사랑은 대부분 어긋나거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볼 때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게 되지만, 한 순간 실수로 땅에 떨어진 금이 간 거울 속의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주체에게는 분명히 낯선 경험이다. 하지만 거울을 일종의 언어라고 가정했을 때 시인이게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시적인 경험에 속한다. 깨어진 거울의 갈라진 틈이 만들어내는 어긋남의 풍경들은 거울이 숨기고 있는 마술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것은 때때로 우리가 어린 시절 바라보던 만화경 속의 풍경처럼 경이롭다.

 


번화가를 걷고 있는데

머리 위에 달려 있던

간판 하나가 불이 나갔다

 

야 그래도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께 너가 했던 말이 생각나고


어제는 애인이 날 버렸다

라고 달력에 적었다

세탁기를 돌렸고 젖은 빨래를 널고

애인이 두고 간 속옷을 돌려주려다 말았다

 

그것이 참 이상하다

 

미래 슈퍼 입큰 노래방 숙희 카페 실비아 호프

빠르게 읽었지만 조금도 덜 슬퍼지지 않는다

무서워 무서워

 

너는 내게 우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말했다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

 

근사한 어른이 되어야지

그게 뭔데?

나는 묻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멋져지고 싶었다

 

궁전나이트에서

불 나간 나 자를 신경쓰지 않는 주인처럼.

 

손은 여기에 있고 발은 저기에 있고

우리는 우리를 우리가 아니라고 믿어보려 애를 쓰다가

 

의자를 책상이라 부르고 책상을 의자라

부르기로 했다

조금 더 그럴 듯해졌다

 

                             ―김소현, 「깊이에의 강요」 전문

 


   생각해보면 사랑처럼 어긋나기 쉬운 것도 없다. 그것도 한마디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어느 순간 한 몸을 이루었던 커플이 아무 것도 아닌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 제목을 따온 김소현의 시는 소설에서 슈투가르트 출신의 미모의 젊은 화가가 ‘깊이가 없다’는 한 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파멸에 이르는 것처럼, 화자는 “우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는 애인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 화자가 생각하는 ‘우리’라는 개념과 애인이 생각하는 ‘우리’라는 개념 사이에 ‘깊이’라는 평가가 개입한 결과이다. 여기서 ‘깊이’는 좀 더 쉽게 말하면 말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일 것이다.

   얼마 후 화자는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애인에게 있어서 이별은 번화가를 걷다가 머리 위에 있던 간판 하나가 불이 나가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애인이 두고 간 속옷을 세탁해줄지 말지를 고민하는 화자에게 있어서 이별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인 것이다. 결국 화자는 “우리를 우리가 아니라고 믿어보려 애를 쓰다가” “의자를 책상이라 부르고 책상을 의자라/부르기로”한다. 화자는 이미 어긋나버린 사랑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속의 평론가의 말이나 시 속의 애인의 말은 깨어진 거울의 금처럼 거울을 바라보는 주체를 왜곡해서 보여준다. 의자를 책상이라고 부르고 책상을 의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화자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공간은 진실이 통용될 수 없는 ‘허위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조금 더 그럴 듯해졌다”는 진술이 반어적 의미로 포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귀하가 루주 묻힌 담배를 보내오고, 세상 어디쯤일 이곳은 잠시 귀하의 상상대로 움직인다


필터를 물고 어떤 이름을 발음해본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노출한 사이 그는 이곳의 자전축이 되었다

 

말이 없어도 그는 그의 회화로 충분해지고, 이것이 정물이 아니라면, 귀하가 상상하는 사람은 이것으로 그의 생각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가 상상이고, 입에 물린 이것을 발음할 수 없다면, 하나의 사물이 찢기고 중력의 모양대로 누더기들이 휘감겨지고 만져진다

 

사물들이 팽팽해져간다

 

                                                                                    ―김재필, 「블랙홀」 전문

 

   이 시는 누군가 ‘루즈 묻힌 담배’를 보내오는 것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쪽에서는 ‘루즈 묻힌 담배’의 구체적인 사연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보내온 사람의 의도 속에 숨겨져 있는 상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의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낳게 되어서 그 사물을 바라보는 이의 상상은 무한대로 증폭되게 된다. 시인은 이런 상태를 “하나의 사물이 찢기고 중력의 모양대로 누더기들이 휘감겨지고 만져진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찢긴 사물들은 점점 팽팽해져간다. 이 시는 앞의 시처럼 말의 어긋남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 어긋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느껴지는 사건이 점점 블랙홀 같은 미궁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루즈 묻힌 담배’는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상상을 왜곡시킬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깨어진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블랙홀이 무수한 별을 빨아들여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듯이, 어긋난 사건을 숨기고 있는 하나의 작은 사물이 엄청난 사건을 몰고 올 블랙홀이 될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찬장 위 칸에는 빈 병이 쌓여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다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는 사람이

병을 모은다

 

그 자리에 가만한

그런 일이 있었다

 

지킴이 유니폼을 받아 입고

뚜껑 없는 병처럼 서서

 

박물관 너머에는

철거민의 구호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박제하여 전시하라

 

색을 잃어가는 깃발이

깨진 액자와 나뒹구는 얼굴들이

병 속으로 내려와 앉았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내던져야 하는 것들이

하루의 무게를 더해갔다

 

전시장에 설치된 깨진 거울은

무엇도 반사하지 않았다


발끝에 무엇이 닿든지

철거예정지구의 사물들은

표정을 매달고 있었다

 

찬장을 열면 먼지 쌓인

발목들이 쏟아졌다


―노국희, 「점유」 전문

 


     어긋남은 사랑뿐 아니라 우리의 삶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시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개발을 강행하는 주체와 이에 대항해서 시위를 벌이는 철거민 사이에서 생기는 어긋남의 문제를 시적 소재로 하고 있다. 찬장 위 칸에 빈 병을 모으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부촌이라고 볼 수 없다. 빈 병들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자에 의해서 먼지처럼 찬장 위 칸에 쌓인다. 그런데 여기서 ‘빈병’은 도시 재개발자에 의해서 헐려서 어디론가 없어질 허름하고 낡은 집의 은유이다. 재개발자에게 있어서 ‘빈 병’은 버려질 사물이지만 집 주인에게 있어서 ‘빈 병’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가치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낳는다. 이 시에서 ‘전시장에 설치된 깨진 거울’은 철거민들을 억압하는 개발주체를 상징한다. 그 거울이 ‘무엇도 반사하지 않았다“는 화자의 진술은 개발독재의 독선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찬장을 열면 먼지 쌓인/발목들이 쏟아졌다“는 진술은 철거민으로 상징되는 빈 병들이 쏟아져 나오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뼈아픈 풍경이다.

 



   3. 안개 혹은 그늘의 세계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어 세상을 또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늘 역시 광도가 약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물들의 움직임이 본의 아니게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르다. 안개가 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늘은 빛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안개는 보다 감성적이고 그늘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안개나 그늘은 탈이나 가면처럼 대상을 아주 은폐하지 않고, 거울처럼 비추어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안개나 그늘은 상대적으로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가치중립적이라고 연민이나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머리카락을 뜯어가는 물고기

꿈을 꾸다가 창을 열었어요


2

옆집 여자 K의 지갑을 엽니다 문구점 피자 치킨 커피 쿠폰들 쿠폰에 도장 찍으면 이 세상에 허락된 기분이 들지 살아있다는 이유를 만들어주잖아 가끔 난 물고기 쿠폰이 되고 싶다 수면에 도장을 찍는 물고기 쿠폰, 아래서 위로 솟구치면서 배를 내밀며 죽잖아 그날 K 남편은 그녀가 노래방에서 번 돈을 도끼로 내리치듯 낚아갔다 ‘더럽다’와 ‘미안하다’의 사이에서 뇌병변인 남편은 술을 마셨다 더럽게 미안해서 그녀를 때렸다 K는 주민등록증 사진으로 웃었다

 

―지연, 「안개 저장고」 부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안개 저장고’라고 부를 수 있다. 하루를 눈 뜨면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바다에 수장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다. 이 시의 첫 연 “머리카락을 뜯어가는 물고기”의 이미지는 흡사 세월호를 연상시켜준다. 2라는 번호가 달려있는 두 번째 연은 화자가 옆집 여자 K의 지갑을 열어 지갑 속에서 나온 각종 쿠폰을 별견한 후 느낀 생각들을 진술하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여자 K는 인용 시에서는 생략된 시 3에서 “뱃 속 무중력을 안고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기도한 임산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옆집 사람인 화자가 지갑을 열어서 신원을 확인하게 되고, 화자 역시 “수면에 도장을 찍는 물고기 쿠폰”이 되어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황으로 보아 옆집 여자 K는 임신한 몸으로 노래방 알바를 해서 번 돈을 뇌병변인 남편에게 빼앗기고 구타를 당하고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자의 주변에 서식하는 안개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 비극이 있다. 자살을 기도한 여자의 “나뭇가지에 걸린 무게를 털고”도 여전히 안개는 “수면을 채우며 출렁”이고 있다.


태풍 너구리는 소용돌이 탯줄을 끊고 태어났다

피 묻은 바람이 안고 품어서 그런지

번뜩이는 맹수의 눈을 닮았다

컴퓨터로 복제한 유모의 젖이 늘 모자란 탓에

우렛소리 빗소리 번갈아 꽂은 막대사탕을 물고 자랐다

허기진 궁리는 죄처럼 깊어져

하늘에 붙은 알사탕 하나 꿀꺽 삼켰을 뿐인데

물먹은 길들이 흙의 매듭을 풀고 달아나는 것이다

닻을 내리고 항해 중인 도·시의 옥상들

침몰과 아멘의 속도를 믿는 십자가는 완고하다

 

날카로운 야생의 이빨에 발뒤꿈치 물린 가로수들 자지러진다

까르륵 흔들리는 것이 저리 신나는 일인지

나조차 내 맘대로 펼치지 못한 돛이 있다

늑골을 딛고 자란 한 그루 사과나무

도저하게 매달린 쓴 열매는 삶의 바이러스였다

살아있다와 살아간다의 차이를 좁힐 수 없던 암센터 복도에서

투명한 면벽에 들었던 적도 있다

너구리 우리에 갇혀 허공을 할퀴는 수상한 빗금

저것은 혼자 외로운 너구리의 모국어다

사이버 공간으로 굴러 떨어진 풋사과의 통증

낙과의 필사적인 방향으로 혀가 휜다

 

―강서연, 「풋사과 바이러스」 부분

 


    인간이 상처를 입는 공간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공간만이 아니다. 시인은 태풍처럼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이버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이 시에 주체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태풍 너구리’는 “컴퓨터로 복제한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존재라는 점에서 사이버 상의 온갖 악플이나 해악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제목에 등장하는 ‘풋사과’는 애플로 대변되는 사이버 메커니즘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이다. 시인은 이 땅에 태풍이 몰아닥칠 때 느끼는 위기감을 사이버 상에서 더욱 크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닻을 내리고 항해중인 도·시의 옥상들은 “침몰과 아멘의 속도를 믿는 십자가”처럼 이러한 위험을 쉽게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켜준다. 컴퓨터는 인간이 만든 가장 첨단적 문명의 이기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안개와 그늘은 오프라인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눕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누우면 그늘이 뿌리째 뽑히죠.

케냐에 사는 나무들은 누운 자세로 밀림을 만든다지만

슬픔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그늘이 만들어지겠습니까?

아이들은 금지구역 안에 있습니다.

엄마한테 안 가고 학교에도 안 갑니다.

금지구역은 소란스럽고 상업적인 일들이 가득해서

말이 말꼬리를 잡고 다툼이 서로를 전염 시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와 비도덕적 신념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감염 속도가 빨라 확진 환자처럼 언제나 고열입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나무가 하는 일은 그늘을 만드는 일이고

자신의 발밑에 그늘을 가두는 일뿐이지요.

다시 눕는다면 그늘은 멀리 달아나 버리겠지요.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하는 그늘,

엄마는 오래 앓습니다.

평생 견디고 있습니다.

 

―김이솝, 「견인(堅忍)」 전문

 


   케냐는 본래 비옥하고 광활한 숲 속에서 온갖 생물들이 평화롭게 공생하던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문명의 힘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고 끝내는 맑은 물조차 얻기 힘든 저주받은 땅으로 전락하게 된다. 덩달아 보호를 받아야 할 천진한 아이들까지도 땔감과 먹을 물을 구하기 위해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척박해진 땅에 한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펼친 것은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여사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게 되고 그녀는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서 ‘나무들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김이솝의 시는 이러한 케냐의 근대사를 집약해놓은 생태시로 읽힌다. 시인은 나무나 숲을 ‘어머니’로 비유해서 아픈 어머니가 “누우면 그늘이 뿌리 째 뽑히”게 되는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는 ‘그늘’은 부정적인 의미의 그늘이 아니다. 여기서의 그늘은 오히려 문명이라는 땡볕을 가려주고 아프리카의 척박한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평화의 그늘이다. 하지만 나무는 그다지 힘이 세지 못하다. “나무가 하는 일은 그늘을 만드는 일이고/자신의 발밑에 그늘을 가두는 일뿐”이고, 막강한 문명의 힘에 대항해서 묵묵히 견디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지면관계상 2016년 신춘 시인들의 모든 시를 구체적으로 거론 할 수 없는 점 양해를 구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조상호의 「그 페이지를 기억한다」는 시인이 전남 완도 정도리에 있는 구계등 바닷가의 추억을 시로 쓴 것인데, “바다가 보이는 공중정원/해변의 그네/호랑가시나무 숲”으로 기억되는 시인의 사랑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회고시이다. 하지만 시가 전체적으로 개인적인 체험에 갇혀있어 확장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명우의 「물맛」은 약수터의 변함없는 물맛을 아기에게 먹이는 모유에 비유해서 쓴 시이다. “공기 몇 그램을 넣어도/ 햇빛 두 숟가락을 넣고 뒤섞여 놓아도/몇 억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그 맛”에 주목한 것은 좋으나 좀 더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이윤정의 「핫 소스」는 핫 소스 양념을 한 음식을 뜨거운 사랑에 비유한 시인데, 시인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고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힌다. 진혜진의 「참외」 역시 사랑 시인데, 참외를 기타에 비유한 것은 참신하지만 두 사물 간의 유사성을 보편적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승화시키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강기화의 「무기력이 멀리 뛴다」 는 무기력증에 걸려서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자가 무기력증에 빠진 이유는 깨어진 직관의 유리조각에 손이 베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세월호 같은 엄청난 충격의 후유증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말미에 친구를 만나면 방치된 프린터를 수리하겠다고 해서 무기력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무기력이 멀리 뛴다’는 제목의 주제의식을 보다 심화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구애영의 「컵밥」은 노량진 고시원 근처 먹자골목에서 쓸쓸히 컵밥을 먹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낙오자만이 즐길 수 있는 생존컵밥”이 “절대 자살을 위한 레시피가 아니”라 “밑바닥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시인의 이러한 주장은 반어적으로 읽혀져서 오히려 가슴이 짠하다. 끝으로 정영희의 「습기 찬 방」은 지하방 같은 습기 찬 방을 시인의 파편화된 내면풍경과 연계해서 쓴 시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들이 구체성이나 보편성을 얻지 못하고 지극히 개인적 느낌의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 시가 전체적으로 파편화된 사변의 묶음으로 읽히는 점이 아쉽다.

    이상으로 2016년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의 시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청탁과정에서 지면이 문제가 되어서 모든 신춘 시인들에게 지면을 할애하지 못한 점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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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약력: 경기 고양 출생.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난 아침』이 있고, 평론집으로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계간 <시산맥>2016년 여름호.

 


[출처] 분열된 목소리, 탈과 거울과 안개의 세계-2016년 신춘문예 시인들의 시:-박남희(계간 시산맥 2016년 여름호)|작성자 박남희 http://blog.naver.com/poemis77/220719887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