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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문제점 /손광성

희라킴 2018. 1. 2. 18:43


                                  글 쓰기의 문제점
                                                                                              손광성

 글을 쓸 때 우리는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사나 어휘의 선택에서부터 문장의 배열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제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 쓰는 말 가운데 우리가 자의적으로 만든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모국어란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역사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약속이다. 그것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약속된 규칙을 존중하면서 모국어가 가진 고유의 향과 결과 가락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 즉 봉사하는 일이다.


 그렇게 했을 때, 자연스러운 글이 태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어휘와 어휘가 충돌하고 구절과 구절이 서로 배반하여, 문장은 거칠어지고 의미는 뒤틀리며 감동은 사그라지고 만다. 결국 이런 글은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뿐만 아니라, 모국어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말 것이다. 한 작가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모국어의 발전에 기여한 작가'라 불리는 일이다.


《수필과 비평》 7·8월호에 실린 출신작가 특선 작품 26편을 모두 읽었다. 매일 30도를 넘는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았던 것은 좋은 글들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그런 기쁨을 준 작가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것은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훌륭한 작품에서 흔히 지적 될 수 있는 '옥에 티'같이 극히 작은 것에 대한 나의 소박한 의견이라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1. 어휘 선택의 문제

 어휘 선택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선택하려는 어휘와 이웃 어휘가 어느 정도로 잘 조화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조화란 어휘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휘들이 가지는 외적인 형태나 계통 또는 수준들 사이의 조화를 의미한다. 어휘는 추상적인 기호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로 색과 결과 냄새와 무게가 있다. 고유어에 대하여 한자어와 외래어가 있고, 추상어에 대하여 구체어가 있다. 또 어떤 말은 비속하고 어떤 말은 저희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여 다른 말이 오는 것을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이 서로 맞지 않아 이음새가 흉해지거나, 아니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리거나 또는 서로 충돌하여 대단히 어수선한 문장이 되기 싶다. 다음 예를 들어 보자.

 작은 산새 한 마리가 꽃대 속으로 스며든다. (a)등짝은 천마지 물빛처럼 파랗고 (b)복부는 잘 바랜 모시 필처럼 하얗게 (c)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문에서 (a)"등짝"과 (b)"복부"는 결이 서로 맞지 않는다. (a)는 고유어면서, 비속어에 속하고, (b)는 한자어이면서, 평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결을 맞게 하려면 어느 하나로 통일시켜야 문장이 순탄해진다.

 

 이때 고려해야 할 점은 고유어와 한자어의 성격이다. 대체로 고유어는 정서적이고 부드러우며 친근감을 준다. 그와는 달리, 한자어는 논리적이고 딱딱하며 사무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글이 서정적 수필이기 때문에 전체의 성격에 맞추려면 고유어로 통일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b)를 고유어인 '배' 또는 '가슴' 또는 '가슴께' 정도로 고친다. 그리고 (a)도 비속어에서 고유어로 바꾸는 것이 좋다. 수필은 품위의 문학이라고 한다.


 (c)도 어휘 선택에 무리가 있다. 조화의 의미는 비슷한 것끼리 잘 어울린다는 뜻인데, 흰색과 파란색은 같은 계통의 색이 아니다. 대비 색이다. 따라서 조화라는 말보다는 대조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 이 글을 다시 고쳐 쓴다.

 작은 산새 한 마리가 꽃대 속으로 스며든다. (a)등은 천마지 물빛처럼 파랗고 (b)배는 잘 바랜 모시 필처럼 하얗게 (c)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도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첫째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시제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예정된, "2. 비효율적인 비유들"과 "3. 시제 일치 문제"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같은 구절이나 문장에서 같은 구실을 하는 두 개 어휘가 있을 때 그 외형적인 형태도 통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다음 예문을 보자.

 오솔길에는 (a)'수목의 청신함'과 (b)'야생화의 풋풋한 미소'가 있다.

 위의 예문에서 (a)와 (b)는 문장성분상 같은 역할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운율 상으로 대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운율의 효과를 낼 수도 있는데, (a)"청신함"은 명사형이고 (b) "풋풋한"은 관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락이 맞지 않는다. 이런 경우 (b) 2-11를 같은 명사형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a)를 (b)와 같은 관형사형으로 바꾼 다음에, "미소"에 호응할 수 있는 말을 (a)에 보충하여도 좋을 것이다. 위에 말한 내용에 따라, (A)와 (B), 두 개의 문장을 만들어 본다.

 (A) 오솔길에는 수목의 (a)청신함과 야생화의 (b)풋풋함이 있다.

 (B) 오솔길에는 수목의 (a)청신한 '표정'과 야생화의 (b)풋풋한 미소가 있다.그래도 어딘가 미완성인 듯한 느낌이 든다. 이유는 (a)"청신한"과 (b)"풋풋한"이 같은 계통의 어휘가 아니기 때문이다. (a)를 '싱그러운' 정도로 바꾸면 어떨까? 이제 다시 고쳐 본다.

 오솔길에는 수목들의 (a)싱그러운 표정과 야생화의 (b)풋풋한 미소가 있다.

 다음은 선택된 어휘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이다.

 지난 시절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 떠오르면 여생의 어느 길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꿈에 젖을 수도 있다. 오솔길에서 맛볼 수 있는 이런 (a)퇴영적인 느슨함은 나에게 더 없는 (b)환상적인 행복감이다.

 이 글에서 (a)"퇴영적인 느슨함"과 (b)"환상적인 행복감"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앞에서 옛 연인을 생각하는 일을 퇴영적이라고 비판하고는 금방 환상적 행복감이라고 했으니, 독자는 어는 것이 진정한 필자의 생각인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퇴영적이니, 환상적이니, 하는 어휘는 이 문장 전체를 두고 볼 때에 너무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a)'퇴영적인 느슨함'을 '막연한 꿈' 정도로 하고 (b)'환상적 행복감'을 '오붓한 행복'정도로 참아두면 안 될까?

 오솔길에서 맛 볼 수 있는 이런 (a)'막연한 꿈'도 나에게는 더 없는 (b)'오붓한 행복'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정적 수필에서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면 문장 전체가 경직되기 쉽다.

 여왕벌과 더불어 (a)번식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들이었건만 번식기가 끝난 후엔 양식절약을 위한 (b)냉혹한 생존의 법칙에 따라 쫓겨난 것이었다.

 (a)"번식이 한 축을 담당했던"을 '한 가정을 이루었던'으로 누그러뜨리고, (b)"냉혹한 생존의 법칙"은 생략하면 어떨까? 현명한 작가는 행과 행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행. 그것을 읽는 즐거움, 그것이 독자의 몫이다. 고쳐서 써 본다.

 여왕벌과 더불어 (a)'한 가정을 이루었던' 그들이었지만 번식기가 끝나자 양식절약을 위해 가족들로부터 쫓겨난 것이었다.


 글을 쓸 때는 어깨에서 힘을 빼야 한다. 아니면 문장이 딱딱해지기 쉽다. 경직성, 그것은 즉은 것들의 존재 양식이지 살아 있는 것들의 존재 양식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며 낭창거린다.


 그리고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같은 말의 중복을 피해야 한다. 강조의 효과를 위한 반복법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


 끝이 보이지 않는 (a)에메랄드 빛 (b)푸른 바다, 나이를 잊은 중년의 지우들은 초원에 방목한 망아지인 양 동심으로 돌아간다.

 (a)"에메랄드 빛"은 녹청색이다. 다시 말해서 녹색 기운이 도는 청색, 즉 '푸른 색'이다. 그런데 (b)"푸른"이 또 뒤따라 나온다. 푸른색이 중복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 색상이 더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백마'보고 '흰 백마'라고 하고, 눈을 보고 '흰 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다란 말에는 '푸른'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다. '바다'라고 하면 우리 머리 속에 연상되는 것은 '푸른 빛 바다'이기 때문이다.


 (b)를 생략하고 '에머랄드빛 바다'라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경제라는 것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내는 것이라면, 글 쓰기도 경제 원칙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단어로 최대한의 감동을 주는 것, 그것이 글 쓰기의 경제학이다.

 2. 비효율적인 비유들

 비유에는 비유되는 말과 비유하는 말이 있다. 앞의 것을 원관념(元觀念), 뒤의 것을 보조관념(補助觀念) 이라고 한다. 보조관념은 원관념을 효과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감각적인 사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두 관념이 어느 한 면에서 유사하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 유사성, 그것이 중요하다. 잘못 선택된 보조관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묘소 옆에는 엉컹귀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그 옛날 누님이 입고 있던 하얀 저고리 앞섶에 (a)나부끼던 옷고름처럼 (b)연한 자주 빛은 금시 눈물이 배일 것같이 차갑다. 그리고 그 (c)모양은 그 옛날 아버지가 쓰다 버린 (d)몽당붓처럼 끝이 풀리어 있다.

 이 글은 엉겅퀴꽃의 (b)색깔과 (c)모양을 (a)옷고름과 (d)몽당붓을 보조관념으로 끌어다가 감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글이다. 그런데 엉겅퀴꽃의 (b)연한 자주 빛을 표현하기 위해 가져온 "옷고름"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작가의 누나가 입었던 저고리의 옷고름이 연한 자주 빛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글을 쓴 작가만의 체험이지 옷고름의 보편적인 색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가 연상할 수 없는 특수한 사물을 보조관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둘째는 엉겅퀴꽃의 특이한 모양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져온 보조관념 (d)몽당붓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만약 전체 문맥에 관계없이 인용된 부분에서만 생각할 때, 우리가 엉겅퀴꽃의 보조관념으로 몽당붓을 채용했다면 그 효과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선 그 형태에 있어서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몽당붓은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인 사물이다. 그런 면에서 일단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몽당붓이 주는 느낌. 즉 감각은 엉겅퀴꽃의 아름다움을 훼손한다. 어떤 몽당붓도 결코 꽃처럼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몽당붓은 먹물에 찌든 회색이며, 윤기가 없는 털이다. 따라서 전체 문맥을 떠나서 이 부분만 가지고 말할 때 몽당붓은 엉겅퀴꽃의 보조 관념으로 적당치 않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이런 설명은 이 작은 문단에서만 적용된다. 이 글 전체로 볼 때 인용된 단락 뒤에 아내와 아버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몽당붓이 하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가는 그렇게 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 둔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다른 사물을 연상한다. 그런데 그 때 연상되는 사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엉겅퀴꽃의 경우 연상을 좀더 계속해 본다면 몽당붓 외에도 몇 가지 유사한 영상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엉겅퀴꽃에서 연상될 수 있는 사물을 들어 보자. 우선(1)몽당붓이 떠오르고, 그 다음 (2)귀얄 같은 것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쁜 엉겅퀴꽃의 보조관념으로는 적당치 않다. 그렇다고 여기서 상상을 멈춰서는 안 된다. 꽃의 빛깔과 모양과 아름다움까지 포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 아니면 직서법으로 쓰는 것이 오히려 낫다.


 엉겅퀴꽃처럼 생긴 것으로 여인들이 쓰는 화장 용구에 '부러쉬'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분솔' 또는'화장솔'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화장솔을 분석해 보자, 화장솔은 그 색이 아름답다. 분가루가 묻었다면 살색이나 분홍에 가까울 것이고, 눈 화장을 하는 것이라면 연한 자주색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몽당붓에 비한다면 첫째 형태 면에서는 동등하더라도 색상은 물론 향기까지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여인들의 애용품이다. 아내를 연상시키는 매개체로도 손색이 없다.


 이제 이 글을 고쳐 보자.
 묘소 옆에는 언제 피었는지 엉겅퀴꽃들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아내가 늘 쓰던 연보라 빛 화장솔 같다. 이제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내가 저렇게라도 꽃을 피워서 나의 슬픔을 달래려는 것일까.

 엉겅퀴꽃을 화장술과 연결시킴으로써 곧 살았을 때의 아내의 모습, 그 가운데에서도 화장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더 애틋한 정을 나타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비유의 성공여부는 보조관념의 선택에 달려 있다. 효과의 극대화는 두 관념의 거리가 멀면서도 통합적인 인상에서 공통성을 가질 때 성취된다.


 다음 예문은 1항'어휘의 선택의 문제'에서 일단 고친 것이다. 여기서는 비효율적인 비유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기로 한다.
 

 작은 산새 한 마리가 꽃대 속으로 (a)스며든다. 등은 (b)천마지 물빛처럼 파랗고 배는 잘 바랜 (c)모시필처럼 하얗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글의 첫째 문장의 주어는 "산새 한 마리가"이고 그에 대한 서술어는 "스며든다"이다. 그런데 스며든다는 움직임은 어떤 액체상태의 사물만이 가능한 움직이다. 다시 말해서 새를 액체 상태의 사물에 비유한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두 관념사이에 유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그대로 직서법으로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둘째 문장에 나오는 (b) "천마지" 물빛이라는 보조 관념에서 "천마지"는 작가가 거주는 어느 특정지역에 있는 고유명사인 모양인데,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킬지 모르지만, 그 밖의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독자들에는 아무런 구체성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글이란 특정지역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보조 관념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보조 관념은 누구나 연상 할 수 있는 그런 구체적 사물이어야 한다.


 (c) "모시 필"이란 보조 관념이다. 원 관념은 '산새의 배'인데 두 관념 사이의 유사성은 어느 정도 희다는 것이다. 작은 산새의 하얀 배를 감각적으로 나타내기에 모시필은 맞지 않는다. 모시필은 배의 깃털에 비해 거칠고 귀여운 맛이 없으며 또한 피륙이라는 이미지는 산새의 배를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목화 송'이나 그에 가까운 어떤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말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하나 더 들겠다. 누나와 동생의 대화에서 달에 대한 두 가지 보조관념이 나온다. 누가 말한 보조관념이 보다 달에 대한 통합적 인상에 근접해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누나."
"응?"
"누나는 달이 뭣처럼 보여?"
"그야 쟁반처럼 보이지."
"너는?"
"난, 꼭 축구공처럼 보이는데."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달은 구형이므로 동생의 말이 더 원 관념에 접근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달은 구형이 아니라 원이다. 또 축구공은 역동적인 심상으로 받아들여지며, 그 표현이 가죽이라는 우리들의 과거 경험 때문에 차게 느껴지지 아니한다. 그런데 달은 찬 느낌을 준다. 쟁반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선 유리나 사기 질이므로 얇고 차게 느껴진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쟁반이 축구공보다 시각적 측면뿐만 아니라 촉각적 측면에서도 달에 더 접근해 있다. 따라서 누나의 표현이 더 효과적이다. 만약에 돌확이나 자배기에서 건져 낸 얼음 같다고 하면 더 효과적이 될 것이다. 이처럼 보조관념은 통합적으로 원관념을 나타낼 수 있을 때 더욱 감동적이 된다.


 아무리 문학이 상상의 산물이라 해도, 사실을 바탕으로 두지 않을 때는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a)작은 풀벌레가 목놓아 우는 사연을 풀어 주고, (b)바람과 구름의 신통한 교미를 지켜보며….

 (a)와 (b)가 모두 의인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a)는 과장이 심한 것 같다. 주어진 "작은 풀벌레"에 비해 서술어인 "목놓아 우는"이 너무 크다. 그리고 놀라운 발상이긴 하지만 (b)는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이런 경우는 비유를 쓰기보다 직서법을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비유는 정확해야 한다. 어중간한 것으로는 효과를 얻지 못한다. 또 너무 많이 쓰면 문장이 느끼해지고, 너무 아껴 쓰면 문장이 팍팍 해지는 것이 비유이다.

3. 시제 일치 문제

 최근 발표되는 수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제일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시제가 통일되지 않은 글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말에서는 시제 같은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문학 장르마다 기본 시제가 있다. 시와 소설과 희곡의 기본 시제는 현재이다. 그러나 수필은 과거가 기본 시제가 된다. 물론 시에서도 과거 시제로 쓸 수가 있고, 소설도 인칭 서술자 시점인 경우는 과거시제를 쓴다. 희곡에는 과거시제를 쓰지 않는다. 언제나 현재이다. 수필의 기본 시제가 과거인 것은 특히 서사수필에서이다. 서정수필인 <실록예찬>,<백설부>,<나의 사랑하는 생활> 같은 경우는 현재형이다. 수필에서 현재형을 쓸 경우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습관적인 행동이나, 어떤 장면의 현장감을 주기 위해 가끔 쓸 때가 있지만, 자신의 체험을 서술하는 서사수필에서는 과거시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예문의 시제를 살펴보자.

 마음이(a)뒤숭숭하다. 나는 이윽고 메모지를 (b)펼쳐 들었다. 막상 유서인지 그 비슷한 걸 쓰려니 큰산이 가로막힌(c)느낌이다.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까지는 뭔가를(d)써야 한다. 부모에게 뜻밖의 일이 생기더라도 내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줄 만한 문구가 (e)떠 오르지 않는다. 나는 막내에게 긴급 상황이 아닌 보통의 유서를 쓰기(f)시작했다.


 이 글을 보면 현재와 과거가 무질서하게 쓰이고 있다. 그렇다고 자동 기술법을 쓴 것도 아니다. 내키는 대로 (a)현재, (b)과거, (c)현재, (d)현재, (e)현재, (d)현재, (f)과거이다. 이것을 모두 과거시제로 통일시켜 본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쓸 때는 이미 지나간 일을 회상하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a)뒤숭숭했다. 나는 이윽고 메모지를 (b)펼쳐 들었다. 막상 유서인지 그 비슷한 걸 쓰려니 큰산이 가로막힌 (c)느낌이었다.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까지는 뭔가를(d)써야 했다. 부모에게 뜻밖의 일이 생기더라도 내 아이들 마음을 진정시켜 줄만한 문구가 떠오르지 (e)않았다. 나는 막내에게 긴급 상황이 아닌 보통의 유서를 쓰기 (f)시작했다.

 문장은 자연스러워졌고 느낌은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다음 예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어떤 변함 없는 성격 같은 경우는 현재형을 써야 한다.

 얼마 전 큰동서 내외가 (a)다녀갔다. 이제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른다며 여유 있게 시 간을 내었다고 (b)한다. 세월의 무심함과 바보처럼 살았다는 후회를 자주 뇌이시는 형님에 대한 (c)배려였을까. 시숙은 먼 길을 손수 운전해서 (d)오셨다. 칠순을 넘긴 형님 내외는 생을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선 것 (e)같다. 시숙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시거나 비디오에 담아두기 여념이 (f)없다. 형님은 차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불편해 (g)하신다. 자네도 머지 않으니 몸 관리 잘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 (h)곁들인다.


 나는 몸을 관리하거나 아낄 줄을 (i)모른다. 신혼 때 오붓하게 둘이서 신혼 살림의 쏠쏠한 맛을 즐기지도 못하고 시동생 시누이까지 여섯 식구가 함께 (j)살았다.

 (a), (c), (d), (j)는 과거이고, (b), (e), (f), (g), (h)는 현재로 되어 시제가 통일되지 않았다. (b), (e), (f), (g), (h)는 과거로 고쳐야 한다. 그러나 (i)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 없는 성격이므로 현재형이 맞는다. 또 성격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서 현재까지 어떤 상태가 계속될 때에도 현재형을 써야 한다.

 매일 아침을 산에서 살며 땀을 흘리고, 일요일이면 높은 산에 오르기를 십 수 년 넘게해와도 한 번 늘어난 체중과 혈압은 좀처럼 내려갈 기척을 하지(a)않는다. 체질도 체질 이지만 저녁마다 마시는 술에 문제가 있음이 (b)분명했다. 술은 줄여 본다고 벼르면서도 생활 패턴 때문이지 그게 (c)쉽지 않다.

 이 글에서 (b)는 '분명하다'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봤을 때 과거의 사실이라도 현장감을 주기 위해 현재형을 쓸 수도 있다. 다음 예문을 보자.


 동량에서 출발한 지 30분. 제1봉의 능선에서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잠시 (a)휴 식이다. 뒤쳐져서 아빠와 올라오던 초등학교 4학년생인 재봉이가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울 음을 (b)터뜨린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비만에 모두가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c)준 다. 그리고 아빠는 구슬리고 달래면서 다시 산을 (d)오른다. 하얀 은사시나무 숲을 지나자 오동나무가 빽빽이 터널을 (e)이룬다. 다시 쭉쭉 뻗은 낙엽송이 시원스럽게 하늘로 (f)솟 구친다.

 이윽고 스크린이 있는 무대 쪽에서 둥둥 북소리가 (a)울려 나왔다. 붉은 악마 리더가 구호를 선창하자 자리를 함께 한 1만여 관중이 질서정연하게 합창을 (b)한다. 한 손을 앞으로 절도 있게 내뻗으며, "대∼한민국, 짜잔짝 짝짝!"하는 엇박자의 구호와 박수소리가 (c)소용돌이 친다. 연습과정을 톡톡히 거친 프로응원단 (d)같다. 어린 중학생들까지 거침이 (e)없다. 컴퓨터와 매스컴 덕분인 듯 (f)보인다.

 (a)에 과거이던 시제가 (b), (c)에 오면 현재가 된다. 군중들의 흥분과 필자의 흥분된 상황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d), (e), (f)에 오면 필자는 어느 정도 객관적 시각을 되찾고 있다. 따라서 (d), (e), (f)는 과거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시제 문제는 쉬운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터득해야 할 문제이며, 그것도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장감을 주기 위한 현재형의 사용은 잘못하면 혼란만 더할지 모른다.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모두 과거로써도 괜찮다. 앞의 예문을 그렇게 고쳐서 써 본다.

 이윽고 스크린이 있는 무대 쪽에서 둥둥 북소리가 (a)울려왔다. 붉은 악마 리더가 구호를 선창하자 자리를 함께 한 1만여 관중이 질서정연하게 합창을 (b)했다. 한 손을 앞으로 절도 있게 내뻗으며, "대∼민국, 짜잔짝 짝짝!"하는 엇박자의 구호와 박수소리가 (c)소용돌이 쳤다. 연습과정을 톡톡히 거친 프로응원단 (d)같았다. 어린 중학생들까지 거침이 (e)없었다. 컴퓨터와 매스컴 덕분인 듯 보였다.

4. 비문법적 문장들

 어법에 맞는 글 쓰기 습관은 작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아무리 현란한 수사를 동원해도 글다운 글이 되지 못한다. 내용 전달에서부터 실패하기 때문이다.

 

 문장 쓰기 단계에서 제일 먼저 주의 할 점은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관계이다. 짧은 장일 경우는 어렵지 않으나, 문장이 길어지면 두 성분의 호응 관계에 혼란이 생기기 쉽다. 따라서 긴 문장을 써야 할 때는 특히 이 문제에 유의해야 한다.

 가치 있는 골동품과 별 볼일 없는 고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a)눈은 (b)엄청나다

 이 글에서 주절의 주어는 (a)"눈은"이고, 거기에 대한 서술어는 (b)"엄청나다"이다. 그런데 두 말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눈이 엄청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주어와 서술어가 서로 호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눈'이란 말 대신 '시각의 차이'란 말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고쳐 보자.

 가치 있는 골동품과 별 볼 일 없는 고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의 차이는 엄청나다.

 다음 예문도 주술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문장이다.

 가정 주부인 나와 여성운동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a)강과 약은 있어도 (b)모두가 다 지 금의 (c)노동은 (d)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 (e)일치할 것이다.

 이 글의 주절의 주어는 "나와 여성운동가와 노동자들 모두가"이고, 거기에 걸리는 서술어는 "일치할 것이다"이다. 그러나 주술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와 여성운동가와 노동자들'이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일치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의견'일 뿐이다. 각기 다른 개체들끼리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치할 것이다'의 앞에 '의견이'란 주어를 넣어야 한다.


 다음은 관형절의 주어인 (c)"노동은"과 그것에 대한 서술어 (d)"만족스럽지 못하다"가 서로 호응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 다음에 '조건' 또는 '환경'과 같은 말을 보충하여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또 (a)'강과 약'도 '정도의 차이'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이제 전체 문장을 다시 써 본다.

 가정 주부인 나와 노동자와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a)'정도의 차이는'있어도, (b)모두가 다 지금의 (c)'노동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운전을 거칠게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문장을 거칠게 쓰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불안한 글을 읽으려 들지 않는다. 작가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예문을 보자.

 나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가족들에게 오기에 찬 반기를 똑바로 세우고 싶은 마음이 울컥 울컥 드는 (a)것일까?


 이 글은 의문문으로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은 당연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평서문으로 해야 한다. 아니면 (a)"것일까?"대신 "∼것은 웬 일일까?"로 고치면 훨씬 나을 것이다. 다시 고쳐서 써본다.

 나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가족들에게, 오기에 찬 반기를 똑바로 세우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드는 것이다.

 이상으로 26편의 글을 읽는 동안 눈에 띄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크게 4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필자의 주관에 의해 잘못 이해되었거나 잘못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기탄 없는 지적을 바란다.

여기에 지적한 것들은 대부분의 훌륭한 글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말하자면 '옥에 티' 같은 것임을 거듭 말해 둔다. 그리고 이번 나의 강연에 있어서 좋은 텍스트가 되어 준 작품의 작가들에게 감사한다. 위에 인용된 예문이 없었더라면 이번 강연의 내용은 지금만큼의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건필을 빈다.

그래도 남은 말들

(1) 겉멋은 부리지 않는 게 좋다.
(2) 수필도 예술임을 잊지 않는다.
(3) 상투적인 어휘는 피한다.
(4) 설명하지 말고 그냥 보여 준다.
(5) 목청을 높이지 말고 조용히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