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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주제와 문학성 /이정림

희라킴 2017. 12. 5. 17:59



수필의 주제와 문학성
                                                                                                                  

                                                                                                                                         이정림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났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느낌을 갖게 된다.


 첫째는, 이 작가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까 하는, 그야말로 감(感)이 전혀 잡히지 않는 글이 있다. 이런 글은 대개 주제가 난삽하거나 애매한 탓에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주제를 끌어 나가는 기량이 부족한 글일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이 작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글이 있다. 이런 글은 한마디로 전혀 주제의식이 없이 쓴 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글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썼다고나 할까.


 세 번째는, 이 작가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구나 하는 감동과 공감을 안겨 주는 글이 있다. 그 감동은 글을 읽는 동안에 느껴질 수도 있고, 다 읽고 난 뒤에 서서히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글은 대개 처음부터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다만 주제가 읽는 도중에 표면에 노출되는 경우는 글이 이지적이며 경문장적(硬文章的)인 데 반해, 주제가 암시적으로 밑바탕에 깔리게 되는 경우는 글이 서정적이며 연문장적(軟文章的)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主題)란 무엇인가. 주제란, 한 작가가 그 글을 쓰는 이유요 정신이요 사상이다. 어느 개인이 자신의 일기장에다 혼자만 읽는 글을 쓴다면, 그 글에 주제가 있든 없든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라는 사람이 남이 보는 지면에 글을 발표한다면, 그는 최소한 작가정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해마다 신인이 적잖이 배출되는 수필 문단의 양산(量産)에 문제성마저 제기되는 현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수필은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은 수필이 문학의 서자(庶子)가 아니라 당당한 한 장르로서 인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전문적인 작가라는 생각에는 그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여유, 생활의 여유, 명예의 여유를 즐기는 귀족주의 내지 선민의식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요인이 수필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투철한 작가정신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원인(遠因)이 되는지도 모른다.


 수필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거슬리는 말은 수필을 신변잡기라고 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소재를 신변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취택한다는 장르적인 특성을 빗대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그 말에 유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수필인들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잡기(雜記)’라는 두 글자다. 잡기라는 말의 사전적인 풀이는‘여러 가지 잡살뱅이 일의 기록인데, 수필의 소재라는 것이 사실상‘여러 가지 잡살뱅이 일’이고 보면, 잡기라는 뜻풀이에도 역시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일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풀이가 아닌 ‘잡기’라는 말이 갖는 뉘앙스에는 분명한 주제가 없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늘어놓은, 즉 작품성이 결여된 객쩍은 말의 기록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이 쓰는 수필이 고작 잡기에 그친다면, 그런 글은 개인의 잡기장에나 써두면 좋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적인 지면에 발표되었다면 그것을 쓴 작가의 수필관 내지 기량에 대해 한번쯤 의심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인간사(人間事)에서 소재를 얻는 수필이 신변잡기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성을 지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혹자는 수필도 문학이라면 창조를 해야 하고, 창조를 하려면 허구(虛構)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필에 문학성이 결여되는 가장 큰 이유는 허구를 허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필에 작가의 중심되는 사상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에 허구를 도입해야만 창작물이 된다는 주장은 하나의 억설(臆說)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은 결코 허구의 문학이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수필이 문학성을 지니느냐 지니지 못하느냐 하는 가름은 허구를 도입하느냐 도입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아무리 허구를 도입했다 해도 거기에 작가의 사상과 철학, 즉 주제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 수필은 문학성을 지니기 어렵다. 그렇다면 허구가 즉 문학이라는 등식은 성립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수필은 일인칭 문학이다. 수필 속의 내가 초등학교 어린이라는 허구적인 인물로 설정되었다면, 그것은 동화나 소설이지 수필이 될 수가 없다. 소설 속의 ‘나’라는 등장인물은 도둑도 될 수 있고 사기꾼도 될 수 있지만, 수필 속의 ‘나’는 인격과 품위가 수반되는 작가 자신인 것이다. 요즘 등장한 동수필(童隨筆)이라는 신조어(新造語)는 수필의 개념을 오도시키는 무책임한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선택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문학이다. 이 말은 수필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 내지 모사(模寫)하는” 문학이라는 뜻이 아니다. 수필이 정녕 사실의 기록이나 모사에 그친다면 그것은 문학성이 배제된 기사(記事)나 실록(實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필가는 수필을 쓰는 데 결코 사실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사실을 소재로 택하게 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글에 자기의 사상과 의미와 철학을 심어 넣는다. 이 의미화 작업을 통하여 수필은 신변잡기에서, 사실의 기록에서 어엿한 문학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수필이 어느 문학 장르보다 진한 감동과 공감과 친근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장르적인 특성 때문이다. 온 일본 열도를 울렸다는 <우동 한 그릇>(구리 료헤이)이 그토록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내게 한 것은, 그 글이 실화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창작 동화라는 것이 밝혀지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괜히 울었지 않아···.”


  “그렇다면 괜히 울었지 않아?”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구성이 허구인 동화나 소설보다 구성이 실제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수필이 독자들에게 더욱 감동을 주고 공감을 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지 않는가.
수필은 수필일뿐이다. 수필에 동수필이 따로 있고, 본격수필과 신변수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애초에 본격수필이 될 수 있는 소재가 따로 있고 신변수필이 될 수밖에 없는 소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수필이 작품성을 지녔느냐 지니지 못했느냐에 따라 수필로서 대접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판가름이 지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판가름은 작가의 시각과 작가의 사상에 좌우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