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기울어짐에 대하여 / 문숙

희라킴 2017. 10. 13. 11:04


 





기울어짐에 대하여


문숙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하자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보란다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다

노처녀였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짝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것도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 게바라도 김지하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 혁명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엉뚱했던 빌게이츠는
컴퓨터 신화를 이뤘다

꽃을 삐딱하게 바라본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고
노인들도 중심을 구부려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돈도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문숙 시인
1961년 경남 하동 출생. 2000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단추』『기울어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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