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얼음의 죽음 / 마경덕

희라킴 2017. 10. 9. 19:17






얼음의 죽음

 

마경덕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포대를 쏟는다

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씩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2015. 제12호 <수주문학상> 수상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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