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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쓰기 - 자폐적 글쓰기와 문지방 넘기 / 서숙

희라킴 2017. 4. 12. 10:06



나의 수필 쓰기 - 자폐적 글쓰기와 문지방 넘기 


                                                                                                                                         서숙


 단번에 알아먹는 글은 매력이 없다. 어디선가 본 듯한 흔히 접하는 이야기의 나열이나 고뇌도 반성도 없이 지루한 글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다. 뭔가 참신한 시각과 접근이 내게 와 닿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초적이고 정련되지 않은 정서와 가벼운 치기, 지나친 파격은 반갑지 않다. 작위적인 '글을 위한 글'은 외면한다. 사유의 틀은 정연하고 문장은 깔끔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지닌 글이 좋다. 나에게 독서는 심심파적의 대상이 아니다.

 지적 희열이 성찰과 깨달음을 동반하여 법열이라 할 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유희다. 정서적 뭉클함을 통해 고양되고 승화하는 느낌 속에 푹 잠길 때 행복하다. 드물게는 뒤흔들어대는 강력함 속에 내 전 존재를 가두어 헤어날 수 없게 만드는 책을 만나기도 한다. 흡사 회오리바람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짜릿함 가운데 기꺼이 휘둘린다. 이렇듯 나를 사로잡으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갈라놓는 글을 염두에 두면서 나의 수필도 그 방향으로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모저모 머릿속에 복잡한 회로를 이루는 생각의 갈피를 잡아 방향을 잡고 척도를 잰다. 일단 떠오르는 모든 상념들을 다 열거한다. 그런 다음에 응축으로 밀도를 높인다. 소재와 주제를 잡고 나서 내가 글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자의식에 함몰되어 쓰고 싶은 대로 쓰며 비약하며 상상하며 자기만족을 내세우는 이런 태도는 나는 '자폐적 글쓰기'라고 부른다. 퇴고 과정에서는 그래도 의미 전달에 신경을 쓴다. 혼자 보고 치울 게 아니니 타자를 의식하여 얼마만큼 풀어놓고 얼마만큼​ 압축할 지를 고민해야 한다. '문지방 넘기'다. 가급적이면 타인의 동조와 이해를 바라는 노파심에도 불구하고 글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한 명의 독자가 아쉽거늘 안타깝게도 보편성을 얻기에 한계가 있나 보다. 나의 글은 이렇게 '자폐적 글쓰기'와 '문지방 넘기'의 이중성을 지닌다.

 나의 얼굴에는 유난히 팔자주름이 선명하다. 관상가들은 팔자주름이 깊은 사람은 주관이 뚜렷하고 약속과 원칙을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나치면 독선적으로 흘러 고독해질 염려가 있다고 한다. 일리가 있게 들렸다. 나의 별자리인 천칭자리의 사람들은 판단력이 좋으며 무슨 일거리든지 혼자서 다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어떤 성격유형테스트에서 나는 investigator로 분류되었다. 수필가니까 이왕이면 creator로 나오면 좋겠지만 수집하고 해석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니 아쉽지만 조사결과에 수긍한다. 천칭자리와 팔자주름과 성격유형의 공통점이 줄긋기로 이어지고 내게 신통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원칙주의자, 이쯤이면 문학정 감성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천칭자리의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정돈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구절이다. 자칭 정리의 여왕인 나의 삶이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과 정리정돈이다. 뭐든지 나름의 심미안을 충족시켜야하고 머릿속도 주변도 말끔해야 한다. 글을 쓰기 전에는 항상 집안을 먼저 치운다. 드디어 천칭의 추가 흔들림을 멈추​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끼가 없는 대신에 곰곰이 살피는 일은 곧잘 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부족한 감성을 보충하고 정돈하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글의 수미일관을 지향한다. 수필은 감성의 마당에 지성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거나 수필을 읽는 이의 머리는 맑게, 가슴은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으며.

 수필은 이미 아는 것을 피력하는 일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해 알아가며 납득하려는 깨달음의 노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카치는 '에세이스트는 자칫하면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찬 기대를 떨쳐버린다'고 하였다. 철학자는 궁극적인 것에 도달했다고 믿는데 수필가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알랭은 '에세이를 시도하는 것은 철학을 문학으로 바꾸고, 문학을 철학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하였다. 쉬운 언어의 표현으로 오묘한 삶의 진정성에 다가가는 글이 상품이라면 다소 어려운 가운데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역할도 못지않게 소중하다. 스토리와 사유의 교직이 정교하고 함축적이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수필은 선문답의 경지가 아니라 친절하고 평이한 가운데 고양된 정서의 품격을 기린다. 더하여 행간에 맛과 멋의 여운이 흐른다면 그것이 수필의 진수일 것이다.

 예술과 문학은 내 존재를 확실히 하는 길이다. 다양성을 확보하여 응축하고 수렴하여 밀도를 높인 자신의 존재를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 행위는 우리가 무심코 넘겨버리는 것을 잘 볼 수 있게 환기시키는​ 것이며, 작가란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것을 보게 하는 일종의 우체부'다. 친절한 길잡이로서의 수필을 추구한다. 생략과 비약이 난무하면 오리무중이고, 길게 늘이고 부연설명을 붙이면 진부하다. 정봉구의 '수필은 교양인의 문학이며, 문학을 굽어보는 문학이며, 수필의 위상은 항상 초연하다.'는 말을 늘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