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공부방

온몸으로 쓰다 / 박헬레나

희라킴 2017. 4. 28. 19:34


온몸으로 쓰다

                                                                                

                                                                                                                                    박헬레나

  딸랑딸랑, 현관문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나는 사간가는 줄 모르고 어줍은 손으로 자판을 더듬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서툰 컴에 긴장하고 퇴고에 몰두하면 날이 새는지 해가 지는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내가 수필과 인연이 닿은 것은 이순을 조금 넘긴, 늦은 나이였다. 무겁게 어깨를 누르던 책임과 의무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무렵이었다. 촌각을 쪼개어 금쪽같이 쓰던 시간이 내 앞에 마냥 쏟아져 널브러졌다.​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복작대던 머리속도 바쁘던 일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무엇인가 몰두할 일이 필요하다고 겁 없이 덤빈 것이 글쓰기였다.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며 가치의 충돌, 문화의 충돌로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된 지경에서 수필을 만났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이질적인 가치관의 파고 속에서 수시로 고개를 드는 자의식과 내면의 갈등을 잠재울 강력한 처방전은 오직 책(문학)이었다. 위아래로 대가족을 거느리고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던 시절에도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있었으니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그를 흠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가웠다. 단박에 친근해질 것 같던, 따뜻하고 정겨워 보이던 그는 막상 정면으로 대하고 보니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 무모한 짝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읽기와 쓰기의 차이를 확인하며 등을 돌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선택이 잘못되었구나 생각하면서도 무엇에 매료되었는지 선뜻 손을 떼지 못했다.

  내 흠모의 대상이 수필이었는지, 문학 그 가상의 세계에서 누리는 자유였는지 알 수 없으나 새로 만난 소통의 통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말이 소통이지 나의 일방적인 , 철저히 한 방향으로서의 배설이었다. 그는 냉정해지라고 끊임없이 채근하면서도 나를 잘 받아주었다. 나는 가슴에 쌓인 응어리, 못다 한 이야기들을 그를 통해 토해냈다.


 다양한 시선으로 사물을 보며 사소한 것들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 산과 들을 배회하기도 하고, 앞만 보고 내닫느라 지나친것들의 원리를 찾아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넘나들기도 했다. 일상에서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의미를 찾아나서는 길, 현실적인 제약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그 길은 낯설어서 신선했다. 그 오지를 헤매는 동안 적어도 나는 순수로 돌아가며 행복감에 젖는다.

  한동안 그에게 몰두했다. 먹고 자는 일 이외에는 수필만 생각했다. 나의 그에 대한 짝사랑은 꽤나 질겼다. 그는 까다로워서 더 매력적이었다. 투명하고 맛깔스러운 문장에 확실한 의미를 담아내기를 요구하며, 손을 뻗어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나를 애태웠다. 그를 향한 갈증에 나는 늘 목이 탔다. 수필의 문학성, 끝내 내가 정복해야할 고지다.


  "엄밀히 따지면 수필은 문학이 아니다."

 나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말이다. 문학이 바로 삶의 이야기이고 사물이 머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이라면 수필도 당연히 그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수필은 문학의 속성인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경험적인 실제상황이 소재가 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경험을 날것으로 기록하지 않고 특정한 의도를 투사하여 예술적으로 재창조하는 창작행위를 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의미화하는 과정에 약간의 허구로 채색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창작인 동시에 수필의 문학성이 된다. 사실과 허구, 그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수용하는 행위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어느 장르보다 문장의 정확성과 정밀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수필이다.


 문학이 인간 삶에 천착하여 대상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이해하고 공감하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이 문학이고자 나는 온몸으로 글을 쓴다. 그 글이 비록 일천한 잡문에 불과할지라도 내겐 그런 것이다.

  나에게 수필은 가슴속에 가라앉은 삶의 찌꺼기들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작업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물질문명의 성긴 틈새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 이정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라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주위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여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가 이야기하고 해답을 구하라는 소명이다.


 가야할 길이 멀다. 문단 말미에 이름을 올린 지 십 년이 넘은 지금, 아직도 나는 수필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평생을 살고도 남편을 속속들이 모르듯, 어떻게 써야할지도 잘 알지 못한다. 수필의 '문학성' 운운은 나에게 더더욱 모호한 어휘다. 그저 나의 의지와 꿈과 욕망이 지향하는 곳으로 좁은 길 하나 그어놓고 무모하게 발을 내딛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첩첩오지 어디에선가 내 까닭 모를 그리움의 시원을 만나기 위해 앞을 향하여 자분자분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래서 한유를 즐길 노년에 또다시 시간을 쪼개며 일탈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