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여름 엽서 / 반숙자

희라킴 2017. 2. 23. 22:02




[엽편(나무 잎사귀) 수필]

여름 엽서


                                                                                                             반숙자


 신 새벽에 일어나 토란 밭을 맵니다. 부윰하니 먼동 트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면 대지의 정기가 온몸을 휘감아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됩니다. 밭이라야 서너 골 비닐을 씌운 두둑에 토란 한 톨씩을 심었습니다. 행여 싹이 나지 않을까 조바심치는 내게 곁에서 자라는 풀들이 안심하라고 귀띔해 줍니다. 농사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한다고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는 필요하지 않다고요. 더디지만 분명히 싹을 틔우고 있다는 기별을 보냅니다.


 안개가 가섭산 허리를 휘감은 걸 보니 오늘도 무더우려나 봅니다.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땡볕이라 낮에는 밭에 나가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새벽일을 합니다만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옵니다. 이슬에 옷이 젖어 흙 두더지가 되었어도 마음은 정갈하고 활기찹니다.


 이런 새벽을 아시는지요. 밭에 들어설 때면 신부터 벗는 요즘의 나는 노동으로 하루를 여는 이 시간이 몸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세상에서 저지른 과오들을 밭이랑에 펴놓고 참회의 밭을 매는 순수의 시간, 풀을 뽑고 북을 주며 목숨이라는 단어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기 전에는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촛대에 불 밝힌 호박꽃이나 작은 콩꼬투리도 하나도 어느 날 갑자기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매일 멈추지 않고 고만큼씩 자랍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충실합니까. 그 작은 생명들은 저에게 허황된 걱정일랑 떨쳐버리고 하루하루씩 살라고 일러줍니다.


 여름이 사람들을 더위와 무기력에 시달리게 하지만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이 새벽 무명수건 쓴 촌부가 되어 당신을 소박한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하루를 새것으로 받았으니 새 마음으로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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