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빈집 / 신진숙

희라킴 2017. 2. 23. 20:24



빈집 


                                                                                                                                신진숙

 

 십 년 넘게 산 아파트에 누수가 찾아왔다. 부득이 공사를 하는 김에 엄두가 나지 않아 미뤄두었던 도배와 페인팅을 하기로 했다. 리모델링을 하려면 집을 아예 비워주어야 했으니 이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짐을 싸는 일은 곧 버리는 일의 시작이었다. 이사 경험이 별반 없는 터라 그만큼 버려야할 것이 많았다. 버려야 함은 못쓰게 된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맨 처음 책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의 홍수시대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는 의식 때문이었을까. 어느 사이 애지중지하던 책이 짐스러운 물건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서점에 갈 때 마다 욕심을 부렸던 책들이었다. 책속에 흠뻑 빠지기도 했겠지만 어느 한 부분은 소유욕에서 오는 수집이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엔 아깝기도 하거니와 필자에게, 책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나 지식을 책장에 높이 쌓아둔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소박한 밥상처럼 책장을 비워야겠다는 생각과 웬만한 자료 같은 건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기에 버릴까 말까로 거듭되는 갈등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한 며칠 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그때부터는 버릴 것이 천지다. 한번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사용하지 않으면 그 용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평소 그다지 욕심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이 다음에 쓰기로 된 물품 거의 대부분이 이 다음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으니 욕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젠가 한 문우가 수년 동안 박스를 풀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는 옛날 살림들을 청산해야 할 과거라 했는데, 그 표현대로라면 나는 비교적 청산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과거에 미련이 없는 걸까 하여 마음을 살피기도 했다.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으니 자연 간직해야할 것들이 적은 편이다. 정히 보관해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두 아이의 유년이 담긴 앨범, 배냇저고리, 시부모님의 초상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쓰시던 안경과 파이프가 전부이니 상자 하나로 충분했다.


 며칠 후 마침내 빈 집이 되었다. 짐이 빠져나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아파트 내부를 보면서 나는 웬일로 처음 이사 왔을 때가 생각나며 가슴 한쪽이 뻐근해왔다. 화려하진 않았어도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이 자릴 잡았던, 내 방을 가지게 되어 기뻐하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지저분한 집에서 내가 빠져나간 나의 집이 보였다.


 내가 없는 집이라니, 그것은 외로움을 자처한 일이기도 했다. 글 쓰는 일에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으면서도, 나만의 또 다른 집을 끊임없이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그 날들은 어쩌면 나만의 방을 위해, 버린 집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여류작가는 젊은 날, 시부모 수발에 아이들 키우느라 자기만의 방을 가져보는 게 소망이었단다. 세월이 흘러 수발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남편마저 병고로 세상을 떴다. 자녀들이 결혼하여 넓은 집안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정작 느끼는 건 고독함뿐이었다고, 그 고독함을 일생 소망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을 술회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 든든하기도 하고 편한 감도 없지 않으나 한편으론 더 이상 쓰지 않는 잡동사니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사진을 정리하던 중에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내 젊은 날의 모습이 왜 그리 낯선지.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적 소요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던, 그래서 침잠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기 마음속의 빈자리를 발견하는 게 그리움이라 했던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옛 시간이 그리워진다.


 이제 보름 후면 새로운 빈집이 나를 맞을 것이다. 그 빈집에서의 삶이 크게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한 일상이 계속될 나의 집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담고 있으리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부재하되 존재하는 것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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