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서시 문학상
앵두의 길 / 이경림
그 때 나도 터질 듯 붉었을까
온몸에 빽빽이 그걸 매달고
미친 듯 역류하고 있었을까
생각날 듯, 생각날 듯 앵두꽃 떨어지고
어디 꽃자리만한 영혼이 문득 앵두로 익어갈 때
누군가 간절히
-얘들아, 그만 내려와, 너희들은 지금 너무 빨갛구나
타이르는 저편 하나 없이 막무가내
땡볕인 척 타올랐을까
부지불식의 속을 짓물리고 있었을까
가지마다 아이들을 다닥다닥 매단 그 나무는
왜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 한 자리를 전속력으로 달아났을까
달아나면서, 갈피마다 빨갛게
죽은 아이를 숨긴 채
마침내 가장 여린 가지에 깊이 찔린 것일까
그것이 앵두일까
앵두의 꿈일까
가령, 천지간에 가득한 앵두 하나 있어
희고도 붉고 깊고도 휘둥그런 앵두 하나 있어
아득하고 모호하고 번개 같고 굼벵이 같은 앵두 하나 있어
아침보다 저녁보다 자욱하고 텅 빈 앵두 하나가 있어
마침내, 수미산보다 크고 눈곱보다 작은
새빨간 장롱 같은
앵두 하나 까무러칠 듯 익는 동안
나는 피비린내를 과육 향으로 읽으며
무슨 유구한 영혼처럼 어른거리던 그 나비들을 다 버려야 할까
그러나 나무 위로 올라간 앵두들은 끝내 내려오지 않고
볼이 터져라 달아나기만 하는데
어쩌자고 참
앵두는 앵두
앵두나무는 앵두나무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수선집그녀 1 / 김미희
하루하루를
미싱바늘로 찍어넘기는 그녀
초침보다 천배가 넘는 속도로 시간을 꿰매는 그녀
한 남자가 끌던 수레의 손잡이를 건네받으며
온몸을 녹여 울던 그녀
재봉틀도 숨을 멈추고
흔들리는 그녀의 등만 바라보았다
이젠
상처 때문에 찾아든 옷가지들
기워주고 털어주며 스스로를 꿰매고
길어진 상념은 거침없는 가위질로 잘라
구겨진 마음과 함께 퍽퍽 스팀다리미로 펼쳐내며
고른 이로 웃는 걸 잊지 않는다
오늘도 누군가의 힘 빠진 외투에
잔뜩 기운을 불어 넣어
억새꽃들로 깃을 세운 하루를 손질해 놓고
푸석푸석 어둠이 내리는 골목길을 향해
발틀을 밟아대기 시작한다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특별상
잉카 여자 / 최연홍
두 가닥 딴 검은 머리칼이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고
등짐에는 어린아이가 들어 있던가?
팔려고 만들어진 수공예품이 들어 있다
선한 눈빛
햇살에 그을린 적동색 피부
내 사촌 같은 여자
그녀가 키우는 알파카 털로 짠 스웨터 하나를 팔기 위해
하루를 거리에서 보내는 잉카 여자
그녀는 안데스 산맥을 넘는 짐 실은 야마처럼
오늘도 쿠스코 거리를 지나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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